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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축하합니다. 30000번째 뉴스게릴라가 되셨습니다."

얼떨결에 받은 전화다. 처음엔 어쩌다 가끔 듣던 "축하합니다. 당첨되셨습니다" 하던 어느 업체의 아가씨로부터 듣던 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축하였다. 분명 또 다른 행운이었다.

사람은 변해야 산다고 했다. 도전하는 인생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래 나는 새로운 도전.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면서 2003년 12월 6일 조용히 <오마이뉴스>의 문을 두드렸다(기자회원으로 등록한 것이다).

그런데 그 게 3만번째란다. 1번, 2번도 아니고 3만번. 나로서는 꼴찌 중의 꼴찌로 늦디 늦게 등록한 건데 <오마이뉴스>에서는 뉴스게릴라 3만 명 돌파를 자축하며 <뉴스게릴라 3만 돌파 기념 이벤트>까지 계획하고 행운의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나는 떠오르는 샛별(?)이 되었다. 뉴스게릴라로 등록한 다음날부터 나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인터뷰 신청이 들어왔다. 그리고 지난 7일 광주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오마이뉴스> 강성관 기자와 안현주 기자를 만났다. 이것저것 묻는 기자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취재한 기사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9일자 <오마이뉴스> 메인 화면에 실렸다.

"백수 100일만에 일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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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백일만에 뉴스게릴라로 일감 얻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난국에 직장을 잃은 수많은 실업자들. 그리고 일류대학을 나오고도 취업을 못한 청년실업자들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일감', '일자리'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내 이야기가 실렸던 것이다.

독자들의 반응은 갖가지였다. 청년 실업자의 한이 서린 비수 같은 어느 독자의 한 마디가 맘에 걸렸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게 신고식(?)을 치르고 있었다. 게다가 11일 낮 12시40분부터 2시간 넘게 진행된 온라인 생방송 '뉴스게릴라 라디오 습격사건'(진행: 오연호, 송민성)에서는 내가 첫 인터뷰 손님으로 방송에까지 나오게 되었다.

'뉴스게릴라 라디오 습격사건'의 진행자 오연호 대표기자와 송민성 뉴스게릴라
'뉴스게릴라 라디오 습격사건'의 진행자 오연호 대표기자와 송민성 뉴스게릴라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처럼 화려하게(?) 3만번째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가 된 나는 새삼 내 평생직장을 물러나던 날의 기억이 새로웠다.

정년퇴임 하던 날

2003년 8월 27일 12시. 목포시 목포 부영초등학교 강당에서는 35년 동안 오로지 외길 교직에서 2세 교육을 위해 헌신해 온 한 노(老)교사의 정년퇴임식이 있었다. 아직도 더 일할 나이에 교원 정년단축으로 62세에 정년퇴임을 하는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애당초 퇴임식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와는 사범학교 동기동창이요 친구 사이인, 전라남도교육청 초등교육과장을 지낸 고광창 교장은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손님을 초대하지 않고 가족들과 교직원들만 모여서 조촐한 식을 치르자고 하였다.

하지만 워낙 학급수가 많은 도시학교라 교직원만 60여 명 그리고 어떻게 알고 왔는지 제자들 몇 명, 학부모님 몇 분이 모이고 보니 제법 자리가 꽉 찼다.

창 밖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엔 결혼식마저 하객 하나 없이 나와 단둘이서 눈물로 치렀던 아내가 앉아 있었다. 아내에게 부끄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나와 결혼만 하면 호강을 시켜드리겠다고 해놓고서는 온갖 고생만 시켰다. 그리고 26년간 모셔온 아흔 일곱 살 되신 시어머니께서는 요즘 치매기까지 있어 그 수발하기가 오죽 어렵던가.

식이 시작되었다. 약력 소개가 있고 꽃다발을 받고 송공패와 기념품을 받고 이어 학교장의 송공사가 있었다.

송공사를 들려주시는 고광창 교장선생님
송공사를 들려주시는 고광창 교장선생님 ⓒ 장생주
"장생주 선생님은 나와는 동기동창이요 친구입니다. 학창시절부터 가까이에서 지켜 본 장생주 선생님은 너무도 성실하고…. 그래서 그는 전라남도 교육청에서 신지식인 표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월간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하여 문학상을 받기도 했으며 많은 저서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어린이 글짓기지도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수많은 대회에 아동들이 상을 받게 해주었습니다…."

민망하다. 어쩌다가 남들은 다 승진을 척척 하는데 나는 평교사로 그것도 친구가 학교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친구로부터 퇴임식 송공사를 듣고 있자니 그 심사가 야릇하였다.

옆에 앉아서 학교장의 축사를 듣고 있는 아내의 마음은 어떠랴. 애당초 퇴임식에도 나오지 않겠다던 아내다. 그녀는 본래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는 편이었다. 그래 이제까지 내가 전남문학상을 받을 때 딱 한 번 공식석상에서 나란히 앉아 봤을 뿐이었다.

그런 아내에게 평교사로 퇴임을 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게 한다는 건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비록 제도적인 교직생활이 끝난다해도 앞으로도 어디에서든지 사회를 정화시키는 소금이 되고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제 할 일 다 하시고 자유인이 되셨으니 항상 건강하시고 부디 좋은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송공사가 끝났다. 학교장은 내 손을 꼭 잡고 나를 안아주었다.

이어 젊고 예쁜 김향희 선생님의 송시 낭송이 있었다.

송시를 낭송하는 김향희선생님
송시를 낭송하는 김향희선생님 ⓒ 장생주
당신은
한 평생 가시덤불의 연속인 교육의 길을
후회 없이 걸어 온 우리의 스승
제자들의 존경과 학부모의 신뢰속에
외로운 사도를 실천한 '모범 교육자' 이셨습니다.

당신은
어린 제자들의 밑거름이 되어
촛불이 자기 몸을 불태워 밝은 빛을 발하듯이
그들의 최대한 성장 발달을 돕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봉사와 희생정신을 발휘하셨던 '스승 중의 스승' 이셨습니다.

<중략>
저희는
이제 당신의 여생이 복되고 뜻있는 나날이 되기를 바라면서
당신의 뜻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기를 기원합니다.
매양 스승님을 우러르고 제자들을 그리며
'참스승'이라는 말 다시금 간직한 채
그 의미를 두 손 모아 되새기렵니다.

저희는
늘 교육의 품안에서 자라도록
어머니의 가슴처럼 포근하게 감싸주는
당신과 함께 해 온 삶
사랑 앞에 깨어지고 낮아지는 자세로
항상 겸허하게 살렵니다.


이어 전교어린이회장의 송별사가 있었다.

송별사를 낭독하는 전교어린이회 회장
송별사를 낭독하는 전교어린이회 회장 ⓒ 장생주
존경하는 선생님!

선생님께서 틈틈이 좋은 글을 쓰셔서 저희들에게 정직한 마음씨와 올바른 행동을 하도록 교훈을 주셨고 때로는 다정한 친구가 되어 주셨고, 때로는 자상한 아버지가 되어주셨으며 학교의 행사 때마다 밝은 웃음을 지으시며 자상하게 마음을 쓰셨고 혹 나무라실 일에도 어버이가 그러하듯 부드럽게 타일러 주시던 정이 깊은 분이셨습니다.

저희들 모두가 보다 씩씩하고 바르게 자라 날 수 있도록 항상 어루만져 주시고 타일러 주시던 선생님이셨는데 이제 정녕 우리 곁을 떠나셔야만 한다니 이 믿어지지 않는 사실에 저희들은 모두가 슬픔의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없답니다.

<중략>
선생님! 비록 학교를 떠나시더라도 항상 저희들을 잊지 마시고 더욱 큰 사랑과 가르침으로 저희들의 앞날을 지켜 봐주십시오.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2003년 8월 27일 재학생 대표 김라영


이제 내 차례였다. 단상에 섰다. 객석에 앉아 있는 동료선생님들과 제자들 그리고 학부모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 그리고 친구들을 보노라니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2003년 8월 27일 마지막 인사말을 남기고 있는 모습
2003년 8월 27일 마지막 인사말을 남기고 있는 모습 ⓒ 장생주

감사합니다. 이렇게 성대하게 자리를 마련해주신 고광창 교장선생님 김관중 교감선생님 김종채 교감선생님 그리고 여러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바쁘신 데도 자리를 함께 해주신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님과 위원님. 그리고 2학년 1반 어린이들의 학부모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오늘 저는 실로 감격스러운 자리에 섰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20대 초반에 죽을병이 들어 저승길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소설 같은 사랑을 하며 오로지 한 길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리고 우직하리만큼 글에 미쳐 도전하면 가능한 승진도 않고 글만 써 왔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글을 쓰고… 그렇게 살아 온 세월. 오늘은 또 다른 인생의 새 출발을 위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어찌 보면 부끄러운 제 인생이지만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기도하며 후회 없이 살아 왔습니다.

저는 1961년 3월에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6월 30일에 강진 옴천초등학교에 첫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해에 5·16군사혁명이 일어나 혁명정부에서는 군입대 신체검사도 받지 않은 내게 병역미필자 해임령이라는 법을 만들어 나를 교단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리하여 시골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설로 승부를 걸겠다며 몸도 돌보지 않아서였던가 폐결핵중증으로 8년간 병마와 싸우다 다시 살아나 1969년 2월 1일 드디어 그리웠던 교단(완도 청산초등학교)에 다시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35년 세월! 오로지 아이들 교육에 전념해 왔습니다.

그동안 저는 어린이글짓기 지도, 학급신문, 학교신문 만들기, 강진초등국어교육연구회장, 목포초등국어교육연구회장, 전라남도교육연구원 현직연구원, 강진교육청 장학자료 집필, 전라남도 교육연구원 장학자료 집필 등 실로 열심히 뛰었습니다.

그리하여 교육부장관상, 전라남도 교육감 등급표창 12회, 신지식인 표창 1회, 그리고 강진·신안·목포 등지의 교육장 표창 16회, 그밖에 조선대학교총장상을 비롯한 외부단체상 수상 12회 등 모두 40여 개의 상을 받았으며 마지막으로 정부에서 주는 훈장 하나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승진을 못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이들과 글에 미쳐 도전을 안한 것이지요. 하지만 젊은 후배 동료교사 여러분! 도전하십시오.

존경하는 여러 선생님!

여러분과의 소중한 인연. 늘 잊지 않으렵니다. 늘 함께 한 시간들을 떠올리며 위해 기도 드리렵니다. 또한 40년 가까이 글답지 않은 글을 써왔지만 이제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말을 명심하고 좋은 글로 여러분의 사랑에 보답하렵니다. .

끝으로 내게 오늘이 있기까지 구원해 주신 사랑하는 아내에게 그동안 한과 눈물로… (순간 목이 메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한동안 말을 못하고 서있었다) 가진 것 없고 명예도 권력도 없는 이 못난 남편을 섬기고 병드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들 딸 가르치느라 애쓰신 공덕!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드릴 것 없어 "여보 사랑하오!" 라는 말로 이 죄스럽고 부끄러운 마음 전합니다(순간 하객들의 박수가 터졌다).

끝으로 친구. 동료 선생님들. 학부모님들.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참 2학년 1반 학부모님 여러분! 참으로 죄송합니다.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도중에 그만두게 되어 정말 미안합니다. 용서하시고 똑똑하고 착하디 착한 아이들 다 잘되기를 늘 빌겠습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 인사 올리겠습니다.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눈물의 퇴임사가 끝나자 모두가 일어나 박수를 쳐주었다.

목포부영초등학교 2학년 제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고있는 모습
목포부영초등학교 2학년 제자로부터 꽃다발을 받고있는 모습 ⓒ 장생주
퇴임식을 마치고 어느 식당에서 선생님들과 점심을 함께 하고 차에 올랐다. 동학년 선생님들께서 별도로 2차를 가자는 것도 뿌리치고 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통근을 했던 목포시를 빠져 나왔다. 그날따라 비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일부 선생님들과 기념촬영
일부 선생님들과 기념촬영 ⓒ 장생주

백수(퇴직자) 그리고 뉴스게릴라

이렇게 정들었던 평생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보니 나는 영락없는 백수건달이 되었다. 처음 며칠은 자고 나면 이상했다. 날마다 출근시간만 되면 안절부절 정신이 이상했다. 학교 갈 시간인데. 이제는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오늘은 무슨 행사가 있는 날인데. 이제 퇴근 시각인데….

며칠동안을 몸살을 앓으며 이제 내게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일은 많이 있었다. 나이 예순 둘에 젊은이들 못지 않게 인터넷에 미친 마니아가 아니던가. 그래 개인 홈페이지도 네 개나 만들어 두고 별의 별 게시판을 다 만들어 놓고 날마다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편지도 쓰고 참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여 그동안 세 권의 수필집과 한 권의 전기집 그리고 수많은 공저를 펴내면서 글을 써온 프로 문인으로서 모 방송국 리포터로 칼럼니스트로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아니던가. 하지만 뭔가 또 다른 일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날마다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러나 별로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일류대학을 나오고도 취업을 못하고 있는 판국에 나이 든 내가 일자리를 구한다는 건 하늘의 별따기 일 테고. 뭔가 소일거리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산행이었다. 날마다 산에 올랐다. 무등산에도 오르고 가까운 옥녀봉. 제석산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도 마음이 늘 허전했다. 이제 무엇을 또 하지. 그래 아내 일을 돕는 거야. 이제 아내가 도맡았던 어머니 시중을 내가 조금 덜어드리기로 했다. 그래 방청소며 어머니 요강을 비우는 걸 맡았다.

날마다 어머니 요강을 비우며 살기를 100일. 나는 또 다른 일감을 찾아 나섰다. 바로 <오마이뉴스>에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우선 자유게시판에 들어갔다. 그런데 기자회원으로 등록하면 마음대로 글을 써서 발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 기자회원으로 등록을 했고 행운의 3만번째 뉴스게릴라가 된 것이다.

뉴스게릴라가 되고 나서

이제 원하던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가 되었다. 애당초 내가 뉴스게릴라가 되려고 한 것은 하도 어지러운 세상. 신문이나 텔레비전만 보면 어둡고 답답한 기사들만 가득하고 선행 미담이나 밝은 기사는 눈을 뜨고 찾아 봐도 찾기 어려운 때 시원한 청량음료 같은 그런 정갈한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그래서 인생을 되새겨 보게 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비록 졸문이지만 그 글로 하여 마음이 순화되고 명상을 하게 하는 참으로 감동적인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런데 몇 십 년 글을 써온 나이지만 막상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다 보니 이건 보통이 아니었다.

그간 강진신문사에서, 한국교육신문사에서, TBC(구 동양방송)에서, KBS 목포, 광주 방송국에서 리포터로 기사를 써 봤지만 이곳엔 색다른 기준이 있었다. 명색이 프로 문인인데 몇 번인가 낙방(생나무 글)되었다. 애써 밤을 새우며 쓴 글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생나무 게시판에 들어가 버린다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밖에서 <오마이뉴스>를 지켜 봐 왔지만 막상 안에 들어 와 동참을 하면서 보니 대단한 신문사였다.

네 사람으로 출발한 작은 온라인 신문이 이제 전국은 물론 해외 지사까지 거느린 굴지의 대신문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신문기자 되기는 쉬웠다. 누구나 기자회원 등록만 하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쓴 글을 다 실어주는 건 아니었다. 편집부 기자들의 심사가 까다로웠다. 기사 한 자 한 자를 따졌다. 언제 쓴 글이냐, 실제 가서 취재를 했느냐, 기사를 써 올릴 때마다 반드시 전화로 확인했다. 몇 번인가 나이 젊은 편집부 기자들로부터 '꾸중'을 들으면서 기사작성 요령들을 배워 나갔다.

그리고 이곳 뉴스게릴라들은 자신이 직접 워드를 치고 또 관련사진도 찍고 그 사진을 포토샵으로 크기나 이미지를 조정하고 그 이미지를 기사 속에 올리는 작업까지도 손수 해야했다. 그러다 보니 기사 한 건 작성하는 데 한 나절 아니면 하루를 보내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열심히 기사를 써 올려 보냈다. 기사가 심사를 거쳐 올랐다. 그러나 메인 화면이나 문화면이나 사회면 등의 머릿기사로 올라가는 데는 힘에 부쳤다. 그러나 쓰고 또 썼다.

어쩌다가 메인 화면(메인서브)에 글이 올랐다. 독자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글 한 편에 2300여 회 클릭! 댓글에는 심한 비평글도 올랐다. 낯뜨거운 심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야말로 왕초보인 내가 사진자료를 첨부하면서 어느 군청 홈페이지에 실린 사진을 옮겨다 실었다. 그런데 사진의 저작권자 이름이 내 이름으로 나왔다. 저작권자 서명을 어떻게 하는 줄 아직 모르던 때라 그냥 내 이름으로 둔 게 잘못이었다. 당장 댓글로 사진가의 항의가 들어왔다.

나는 편집부에 사과를 하고 삭제를 부탁했다. 그것은 일종의 '필화사건'이었다. 뜨끔했다. 그런데 편집부의 반응 또한 대단했다. 삭제를 하고서는 항의하던 독자의 글에 시정 조치했노라고 답신을 띄웠다. 이게 바로 <오마이뉴스>의 자존심이로구나 싶었다.

뭔가 바른 글, 정론을 펼치고자 하는 편집자들. 그리고 안으로 보이지 않는 엄격한 규제와 심사를 거쳐 3만 뉴스게릴라들의 그 수많은 정보를 관리하는 힘! 바로 그 힘이 <오마이뉴스>의 큰 자랑이 아닌가 싶었다.

왕초보 뉴스게릴라 생활 15일. 그간 등록 글 20편. 그 가운데 메인서브 2건, 섹션톱 1건, 잉걸 14건, 생나무 3건. 최고 조회수 글(2369회)을 비롯한 7편이 각각 1000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 내 또 다른 일상에 활력을 불어 넣어주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가 되어 한 가지 소득이라면 5시간 넘게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포토샵 작업을 하여 올린 글의 원고료가 비록 단 돈 2000원에 불과한 잉걸 기사였지만 원고료가 쌓여가고 게다가 30여 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이 속속 내게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요즘 참 신나게 산다. <오마이뉴스>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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