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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UN), 반부패의 깃발을 들다

"부패는 우리의 학교와 병원을 파괴하였으며, 우리의 농업과 산업을 망쳐 놓았고 우리의 도로와 일자리를 삼켰버렸고, 우리 사회를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키라이투 무룽기(Kiraitu Murungi) 케냐 법무부장관은 멕시코의 메리다(Merida)의 유엔반부패협약(UN Convention Against Corruption, UNCAC)의 조인식 자리에서 강조하였다. 지난 12월 9일에 개최된 유엔 반부패협약 조인식에는 빈센트 폭스(Vincent Fox) 멕시코 부통령과 존 애쉬크로프트(John Ashcroft)를 포함하여 1백여 개국의 관계부처 장관과 고위관료들이 참석하였으며, 한국에서도 이남주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이 이 자리에 함께 하였다. 유엔은 이날의 조인식과 함께 앞으로 12월 9일을 '세계 반부패행동의 날'로 선포하였다.

세계와 국가를 삼키는 부패

이 날의 조인식은 2000년 12월 4일, 유엔 총회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국제적인 법적 수단의 필요성을 총회 결정 55/61호를 통하여 인정한 이후, 126개국이 참가한 토론과 협의, 논쟁의 결과물이다.

유엔반부패협약은 그 자체로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류사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역사의 지병으로 알려진 '망국병' 부패는 지금까지 글로벌한 차원에서 다루어지기보다는 개별 국가와 정권의 특성으로만 치부되어 왔다.

따라서 스위스 은행의 비밀 계좌, 자금 세탁의 천국인 케이먼 군도나 리히텐슈타인과 같이 글로벌 부패에 대하여 지금까지 세계는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유엔반부패협약(UNCAC, 이하 '협약')은 부패가 더 이상 일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며 글로벌한 문제, 국제적인 협력을 통하여 제어되고 감시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로 인정하였다.

"이 협약의 당사국은, 민주주의 제도와 가치, 도덕적 가치 및 정의를 훼손하고, 지속가능한 발전과 법의 지배를 위태롭게 하면서 사회의 안정 및 안전에 부패에 의하여 야기되는 문제와 위협의 심각성을 우려"라는 말로 시작되는 '협약'의 전문은 부패가 오늘날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주요한 사회적, 환경적 문제의 주범임을 인정하고 있다.

부패는 실제로 그 정도에 따라 심각한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약 1조5천억 불 혹은 세계 경제 규모의 5%가 부패에 의해 잠식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빈곤 국가들이 집중되어 있는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부패로 인한 피해는 심각하다. 자이레, 그리고 지하 경제가 전체 국가 경제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나이지리아의 경우는 부패로 인해 국가 전체가 붕괴의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두 나라가 부패로 인해 입은 손실은 지난 몇 년간 1백억 불에 달한다.

또 파키스탄의 경우 공공사업의 약 30%가 리베이트와 뇌물로 빠져나가며, 방글라데시의 경우는 외국 투자의 약 50%가 부패한 관료들의 주머니로 빠져나간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 역시 역사적으로 부패로 인하여 심각한 피해를 겪었다.

시민사회의 부패 방지 역할과 사적 분야의 부패 인정

모두 8장 71조로 구성된 '협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롭고 효과적인 부패방지 장치이다.

'협약'은 부패방지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협약'의 전문은 "부패방지 및 극복은 모든 국가의 책임이므로…시민 사회, 비정부간기구 및 지역사회기구들의 개별적·집단적 지원과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예방조치'를 다룬 2장에서는 "시민단체와 같은 공공부문 밖에서의 개별적 및 집단적인 적극적 참여를 조장"하며, 국민인식의 고양을 위하여 대중에 대한 반부패 교육과 정보에 대한 접근 보장 항목을 두고 있다.

'협약'은 기존의 부패관련 법과 기구들이 주로 공공분야의 부패만을 다루어 왔던 데 비하여 사적 분야, 즉 기업 영역에서의 부패의 심각성과 그 방지의 필요성 인정하였다는 데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

이미 세계적으로 사적 분야는 그 규모상 공적 분야를 압도하고 있으며, 민영화와 아웃 소싱 등으로 사적 분야는 앞으로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사적 분야의 부패를 국제적으로도 규제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협약'은 21조에서 사적 분야의 부패를 "범죄로 확립하기 위하여 필요한 입법 등의 조치를 채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역사가 될 스위스 은행 비밀 계좌

'협약'의 의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초국적 부패를 감시하고 극복하기 위한 효과적인 상호 법적 지원과 해외로 빼돌려진 불법자금의 환수에 획기적인 조치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협약'을 만들어 내기 위한 협상 과정에 참여했던 128개 국 가운데, 제3세계 국가들의 대부분은 초국적 부패의 단속과 감시, 그리고 불법자금의 환수를 '협약'에 담아내기 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산술적으로는 독재자들이 해외로 빼돌린 불법 자금만 환수해도 경제 발전과 빈곤층의 해소에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지난 수년간 나이지리아는 이전 독재자인 싸니 아바카(Sani Abacha)가 스위스은행의 비밀 계좌로 빼돌린 22억 불을 되찾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멕시코도 이전의 부패한 검찰총장이 미국으로 빼돌린 1천만 불을 되돌려 받기 위하여 6년 동안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멕시코가 미국으로부터 돌려 받은 액수는 단지 1백만 불에 불과했다.

'협약' 이전에 발생했던 초국적 범죄는 감시와 적발, 그리고 처벌의 길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협약'의 체결로 이제 부패와 관련된 초국적 범죄는 감시의 눈길 아래 놓이게 되었다. 도피된 은닉 자산을 위하여 '협약'을 비준한 국가들은 사법적인 협력의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협약'은 또한 "전자적 수단 과 기타 형태의 감시 및 비밀공작"을 인정함으로써 향후 국제범죄의 추적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다. 비밀계좌로 유명한 스위스는 스스로 은행 비밀의 제한을 제안하였으며, 따라서 '스위스은행 비밀 계좌'는 영화나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역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상호 범죄자인도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협약'의 비준만으로도 각 국가들은 부패연루자의 인도를 요청국에 이들을 넘겨주도록 '협약'은 규정하고 있다.

몰수 자산을 희생자와 제3세계에

'협약'은 몰수 재산이 요청 당사국 혹은 전 소유자에게 반환되거나 범죄의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협약'은 "몰수된 금전과 범죄 수익 및 재산의 상당액의 일정한 비율"을 국제연합 기금 제도 내에서 운용할 수 있다고 정함으로써 향후 부패자금이 빈곤국의 경제 개발이나 환경 보존 등 보다 깨끗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협약'을 비준한 국가들은 사법적 의무외에 자국 내의 시민들에 대한 반부패 교육과 프로그램을 제공하여야 하며 개발도상국에 적절한 지원을 해야한다.

사적분야도 포함될 수 있도록 부패방지법 개정 필요

'협약'은 향후 30개 국의 비준이 확보되면 효력을 발휘한다. 한국은 이남주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을 파견하여 이 협약에 서명했다. 국내의 비준 절차만 이루어지면 한국도 이 협약의 효력 범위에 속하게 된다.

'협약'에 상응하도록 국내법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여러 조치들이 필요하다. 얼마 전 KT의 편법 가계약을 고발한 '대가'로 해직된 한 해직자와 일부 사학재단의 부패고발로 해직된 교수들은 부패방지위원회가 자신들의 사례를 접수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문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현재 부패방지위원회는 공직분야만 담당하고 있을 뿐 사적영역의 부패는 아예 접수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협약'과 발맞추기 위해서는 부패방지법이 사적분야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부패방지법은 '협약'에 맞게 시민사회의 부패방지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공공분야와 사적분야의 부패감시를 위한 시민사회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될 필요가 있다.

'협약'은 돈세탁방지를 위한 다양한 국내적 장체 외에도 국제협력을 위한 제반 제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돈세탁과 관련되어 금융정보분석원(KOFIU)가 활동하고 있지만 '혐의거래'에 대한 신고가 특정 액수이상의 의무신고가 아닌 금융창구 직원들의 순전한 '감'에 의해서만 이루어져 말뿐인 제도에 그치고 있다.

실제로 '혐의거래' 신고의무를 어겼을 경우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설립 후 2년이 다되어 가지만 금융정보분석원은 단 한번도 과태료를 물린 적이 없다. 따라서 '협약'에 상응하도록 자금세탁방지관련법의 대폭 손질이 불가피하다.

'협약'은 이제 걸음마를 시작했다. 유엔의 이 '협약'이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보다 유효한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민 사회의 적극적인 부패 방지를 위한 참여가 필수적이다.

유엔반부패협약(UNCAC)을 둘러싼 논쟁과 그 한계
미국, 정치자금 투명화에 반대하다

'협약'이 글로벌 부패를 방지하는 만능의 처방이 될 수는 없다. '협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매운' 부분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으로 중요한 조항의 상당 부분은 의무가 아닌 선택조항으로 둔갑하였기 때문이다. 그 주요한 논쟁과 한계를 조목조목 검토하여 보자.

1. '협약' 1차 협상부터 7차 논의 과정에 지속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던 국제 반부패 NGO인 국제투명성기구(TI)는 다른 무엇보다도 '협약'의 이행을 위한 실행기구와 감시장치의 의무적 보장을 요구하였지만, 최종 '협약'에는 이러한 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적당한 체계화 기구를 설치한다"는 선택 조항으로 수정되었다.(7장 63조 7항) '협약'은 이러한 희석화로 '이빨' 즉, 감시장치를 결여한 종이호랑이가 될 수도 있다.

2. 시민단체들과 제3세계국가들의 대부분은 해외은닉자산의 몰수를 매우 중시하여 '협약'에 관련조항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부 국가들의 주장에 따라 "증거가 충분치 못하거나 재산의 가치가 미미한 경우 몰수를 위한 국제협력을 거부할 수 있다"(4장 46조 9항, 5장 55조 7항)는 애매한 회피조항이 만들어져 향후 은닉자산의 몰수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3. 국제 시민단체들은 '협약'의 발효요건을 20개국 비준으로 낮출 것을 주장하였지만 최종 '협약'에는 30개국 비준으로 규정되었다.(8장 68조) 유엔의 초국적범죄예방협약(TOC)은 논의 과정에 1백여개국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협약'의 발효요건을 "40개국 비준"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발효까지 무려 2년 반의 시간이 걸렸다는 전례를 염두에 두면 '협약'의 발효가 과연 단시일 내에 이루어질지 적지 않은 우려가 존재한다.

4.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둘러싼 논쟁에서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정당자금과 후보자들의 모든 기부내역과 수입과 지출,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는 모든 수입 그리고 기부자와 지출대상의 투명한 공개"를 요구하는 의무조항이 "자금형성에 있어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 조치의 검토"로 희석화되었다.(2장 7조)

5. 멕시코 정부에 의해 제기되고 시민단체들에 의해 지지된 시민들의 공공조달과정에의 적극적인 감시역할을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요구는 반영되지 않았다.(2장 9조) 납세자들이 자신이 낸 세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감시할 권리 또한 가지고 있지만 '협약'에 이러한 권리는 반영되지 못했다.

6. 재량권을 남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획득하거나 제 3자에게 획득하게 해주려는 시도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이 "검토"한다(3장 18조)는 선택조항으로 희석화되었다.

7. 미국은 사적분야를 부패에 포함시키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관철되지 못했다. '협약'은 사적분야의 부패가 감시되어야하고 이를 위한 적절한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다.(2장 12조) 그러나 부패의 유혹, 상부의 압력에 저항하여 양심을 지키는 사적분야의 종사자들을 보호하는 규정의 배제되었다. /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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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간 반부패운동에 몸담아 왔다. 또한 10년간 가족들과 함께 홈스쿨과 대안교육활동을 했다. 편역/편저로는 반부패지도 I, II, III이 있으며, 저서로는 "다리미를 든 대통령-부패 없는 사회를 위하여"(민들레)가 있다. 현재 캐나다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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