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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충격을 받거나 힘든 일이 생기면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길 한복판에 허물어지듯 풀썩 주저앉는 일도 자주 있었고, 그럴 때면 다시 일어서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래서 가끔 이 험한 세상 살아가려면 다리에 힘을 많이 키워야겠다는 우스운 생각도 해보곤 한다.

지난 12월 1일, "다시는 ‘사창가’를 찾지 않겠습니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반성문을 <오마이뉴스>에 제출한 후. 무거운 마음 때문에 문경에서 상주로 걸어가는 길은 멀고도 무척이나 힘겨웠다. 얼마 걷지도 않아 길가에 주저앉는 일이 많았고, 다시 일어나 걷는 일이 쉽지 않았다. 마음의 짐을 덜어내려 쓴 반성문은 얼마 동안 내 마음을 무겁게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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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사창가'를 찾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그날 이후 가장 두려운 것은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일이다. 전화기를 꺼 놓으려고도 했지만 회피한다는 느낌이 들어 말았다. 전화기에 집 번호가 뜰 때의 가슴 떨림과 미안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오마이뉴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처음엔 일부러 받지 않았다. 난 여전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건, 아직까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일인 것 같다. 내 글을 읽은 한 여자후배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충격에 정신적 공황에 빠져있다며,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내 얼굴을 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한다. 차라리 내 ‘커밍아웃’이 없었다면, ‘우리사이’ 편안했을 거라는 말도 적지 않게 듣고 있다.

내가 반성하는 건, 돈으로 성을 사는 특정한 행위만이 아니다. 그런 행위로 대표되는 여성 억압적 모습과 대한민국 남성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남자들이 여성을 돈으로 사는 행위는 인간 본연의 생물학적 욕구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생물학적 욕구의 측면을 강조하고 주장하는 건, 일편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돈으로 성을 사는 행위에 대한 억지 정당화에 불과한 것 같다. 또한 생물학적 욕구를 주장하는 논리 속에는 여성의 성적 욕구는 빠져 있다. 오직 남성들의 '참을 수 없는'성적 욕구만이 있을 뿐이다.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중의 하나가 바로 매춘의 역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런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매춘을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공창제를 주장하는 논리도 받아들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매춘의 역사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남자가 여성의 성을 샀던 역사다. 즉, 여성이 남성에게 성을 팔아 생의 유지했던 역사다. 거꾸로 여자가 남자의 성을 샀던 역사는 거의 없다. 이런 오래된 매춘의 역사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온 여성 억압의 역사를 고스란히 증명한다. 그 변함없는 억압의 권력관계를 잘 보여주는 게 매춘의 역사다.

매춘의 역사에서 변함없는 생물학적 욕구와 공창제를 떠올리는 것 보다, 그 변함없는 권력관계를 떠올리는 게 오늘의 성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를 무시한 채, 그저 어쩔 수 없는 문제로 받아들인다면 남성은 '무감하게' 끝없이 정액을 쏟아내고, 여성은 그것을 '비참하게' 받아내는 관계는 변함없을 것이다.

난 특별한 행위로써 성을 사는 행위만을 반성했던 게 아니라, 그것이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억압의 문화와 행위를 반성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강하게 남아있는 가부장적 문화와 남성권력을 무감하게 '즐긴' 나를 성찰했던 것이다. 또한 성을 돈으로 사고, 그것을 즐기는 것에 무감하며 그런 자신에게 관대한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 문화에 대한 가슴 아픈 고백이었다.

많은 분들이 생물학적 욕구에 기반한 이야기를 하며, 성을 사는 행위를 그저 '참는다', '못 참는다'로 국한시키는 것 같아 염치 불구 다시 글을 적어봤다. 나,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 참자’라는 이야기보다는, 남성 여성 사이의 권력 관계를 해소하거나 그 간극을 좁히려는 노력인 것 같다.

반성문을 쓰고 난 후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면, 이런 반성문조차도 내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기 때문에 그나마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여성들은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란 사실. 우리 사회는 나 같은 놈에게는 '용기 있다'는 말을 하지만, 과연 여성에게도 관대할 수 있을 것인가를 떠올려보면 회의적이다.

내가 돈으로 성을 산 행위에 대해서 세상에 반성문을 제출한 후, 비판이든 격려의 말이든 그 전제에는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여성이었다면, 난 '미친×”이라는 소리를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반성을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조차도 난 남성이라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어지러운 머리와 복잡한 심정으로 걷는 게 무척이나 힘든 요즘이다.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힘겨움이다. 이 힘겨움의 끝에는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더 좋은 내가 되기 위한 고통일 거라며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얄팍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 날 알아볼 것만 같은 두려움도 있다.

그래도 난 남자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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