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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의 산문집 <아내의 맨발>
송수권 시인의 산문집 <아내의 맨발>
우리 나라의 대표적 서정 시인 송수권 시인이 백혈병으로 드러누운 아내의 병상을 지키며 느낀 심정을 적은 애절한 사부곡(思婦曲)을 한 권의 책 <아내의 맨발>(고요아침)로 내놓았다.

그녀는 머리를 깎고 무균실로 올라갔다. 외부와는 차단되어 스스로 걸어 나올 때까지는 이제 더 이상 만나 볼 수 없다. 나는 마지막 시간이 될지 모르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하늘 돌이야.' 철없는 열 여섯 그 어린 하늘 돌을 주워서 덕지덕지 때를 묻혀 놓았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잘 할 수 있지? 잘 할 수 있을 거야.' - <아내의 맨발> 중에서

송수권 시인은 강의가 있는 날은 순천으로, 강의가 없는 날에는 지금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아내의 병실 앞 소파에서 밤을 지새우며 오로지 아내가 무균실에서 살아 나와 주기만을 빌고 있다.

아내가 요즈음처럼 이렇게 큰 그림자로 다가선 적은 없었다고 한다. 평생 시골 시인, 상록수 교사로 섬과 오지를 떠돌며 시만 썼던 그가 학위도 없이 국립대의 시인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아내의 헌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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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의 아내 죽으면 절필 선언할 것"

맨 처음 그이가 발령받은 곳은 여수항에서 격일제의 배를 타고 8시간이 걸려 당도하는 초도라는 외딴 섬이었다. 이곳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돈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한 중학생 또래를 모아 상록학교를 운영했고 틈틈이 무인도를 정복하며 시를 썼다.

똥장군 지고 수박농사 짓던 아내마저 떠나면

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자살을 했다. 동생은 중학교를 나와 이따금 어질병으로 시력이 약화되어 고등학교 진학도 못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온갖 고생만 했다. 동생은 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태어났을 때는 어머니가 병중이어서 젖도 빨지 못하고 자랐다. 그런 외로운 동생이 자살을 하다니….

송수권 시인은 정부로부터 상록수 교사상도 받고 육지로 발령이 떨어졌으나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절망감으로 인해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무작정 산사를 찾아 떠돌았다. 화엄사, 선암사, 쌍계사 등등. 노스님을 모시고 상좌로 머리를 깎을 각오였지만 노스님이 밤마다 술을 드는 괴벽 탓에 절을 떠나 다시 방황하다가 대책 없이 뛰어든 곳이 서울이었다.

그이는 죽으러 서울에 왔다가 서대문 화성여관에서 백지에 시를 휘갈기고는 우연히 남대문 근처의 서점에서 샀던 문예지 <문학사상>에 작품을 투고한다. 원고지가 아닌 백지에다 썼다 해서 작품은 출판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었다. 하지만 당시 주간이었던 이어령 선생이 휴지통에 쌓인 원고들을 털어놓고 보니 희대의 명시 <산문에 기대어> 등 몇 작품이 눈에 뜨였다고 한다.

당시 아내는 아내대로 그를 찾아 나섰고 <문학사상>측은 작품이 당선된 자의 주소를 알 수가 없어 전국에 수소문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 궁리로 옛집을 찾았다. 그때 아내는 지게질에 똥장군을 지고나르며 수박을 키우고 그 수박을 리어카에 싣고 30리 해수욕장으로 나가 팔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등에는 갓난아이가 업혀 있었다. 그가 바로 지금 아내의 옆에서 병간호를 하고 있는 큰 딸 은경씨이다. 큰 딸은 무럭무럭 자라 갖 결혼한 신혼임에도 지금 어머니를 위해 병실에서 매일 생활하고 있다. 그 때의 방황을 잠시 멈추게 한 것이 문학상 당선과 아내의 지독한 생활력에 마주하면서였다.

수술비 대책 없이 회한의 눈물만

그렇게 <문학사상>이 발굴한 첫 시인이 된 그는 문예지 <문학사상>의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3일만에 "서울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어라우"라는 말 한 마디만 남긴 채 시골로 낙향했다.

그 후 그는 남도의 치렁치렁한 한과 가락을 노래한 서정 시인으로 자리잡았고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대표적 상인 '소월시문학상', '영랑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모두 수상하게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서정 시인 송수권을 위해 마지막까지 생계를 이어가던 아내의 마지막 직업은 보험 외판원이었다. "조금만 더 벌어 당신의 집필실을 마련해 주겠다"던 아내는 기어이 전세로 지금의 집필실을 사줬다. 자신의 아픔은 꾹 숨긴 채로 말이다.

그 아름다운 아내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만도 "내가 어떻게 2억 원이 넘는 골수 이식 수술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수술하면 저 우직한 송 교수는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라며 남편 걱정만을 털어 놨었다.

사실이었다. 송수권 시인은 수술비를 내심 걱정하면서도 이미 감각을 잃어버린 아내의 발을 어루만지며 "제발, 수술 받으라"면서 수술실로 아내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돈도 피도 되지 않는 시를 쓰는 자신을 원망하고 절망했다.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連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간지럼 먹이면/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끝내 발바닥은 핧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이제 그짓도 그만두자 하여 그만 두고/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으로 몸을 부리고/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무너져 몇 개월 째/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 <아내의 맨발> 중에서

그이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백혈병 아내 소식이 전해지자 몹시 당황했다. 신문과 방송, 잡지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그이는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단 한가지.

"아내에게 더 이상 부끄럽고 싶지 않다. 시를 안 쓰는 일만이 아내를 두 번 죽이지 않는 길이다. 순천대 내 제자들에게는 또 얼마나 미안한 일이겠는가."

그이가 산문집을 내놓은 것도 글로서 자신을 소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고통 탓이었으리라. 이 책을 내놓은 출판사 고요아침은 출판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명예와 자존심이 생명인 시인에게 어쩌면 이 책이 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죠. 그러나 꺼져 가는 마지막 생명의 불 앞에서 어쩌면 아내분께 큰 용기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속내를 모르는 것 아닌가요? 부부란 특히 그렇죠. 아직도 컴퓨터 앞에서 글쓰기를 꺼리고 흰 종이의 여백에 육필로 글쓰기로 유명한 송 시인의 시 한 줄, 시 한 편마다 공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진솔한 아내 사랑으로 다가설 수 있는 통로라고도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언론 보도 이후 소식을 궁금해 하고 있는 게 사실이구요."

그는 생사의 기로에 선 아내 앞에서 이제 눈물도 다 말라버렸다. 단 한번도 아내를 위해 먼저 희생하지 못했던 이녁의 참회록일 수도 있는 이 책이 부디 "아내가 죽으면 절필을 할 것"이라는 약속을 굳이 지키지 않아도 좋을, 행운의 이정표이길 바란다.

"사랑이란 이렇게도 아름답고 간절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어요. 정말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문인들의 모금 운동도 마다하고 사랑하는 문인 후배들이 보내주는 성금도 마다하는 송시인님의 대책 없는 우직함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길밖에 없지 않겠어요"

송 시인의 순애보를 전해 듣고 이지엽 시인(경기대 국문과 교수)이 남긴 말이다.

아내의 맨발

송수권 지음, 고요아침(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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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언론학박사, 한국기자협회 자정운동특별추진위원장, <샘이깊은물> 편집부장,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한국잡지학회장, 국립등대박물관 운영위원을 지냈다. (사)섬문화연구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저서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섬여행> <바다, 섬을 품다> <포구의 아침> <빈손으로 돌아와 웃다> <예비언론인을 위한 미디어글쓰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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