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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를 뽑아놓은 모습
무를 뽑아놓은 모습 ⓒ 윤도균
나는 작물을 심어서 얻어지는 수확에 대한 기대보다는 밭을 묵히는 걸 너무 안타까워하는 농사꾼, 누님의 마음이 헤아려져 사양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뭔가 심을만한 밭을 물색해달라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에게 누님의 밭을 가꾸자고 할 요량으로 승낙했다.

집에 돌아와 아들에게 "주말 농장하는 셈치고 고모네 밭에다 씨를 뿌리겠다"고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내가 운영하는 독서실을 자리를 지켜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아들은 그렇게 하라고 한다. 아들에게 동의를 얻고 나서 이번에는 친구에게 밭을 가꾸어볼 생각이 지금도 있느냐고 물어보니 어디에 그럴만한 곳이 있느냐고 반색을 한다.

잘자란 배추포기 모습
잘자란 배추포기 모습 ⓒ 윤도균
이렇게 시작된 우리들의 주말농장에 우선 감자를 심었다. 지난여름 장마 기간 중에 첫 수확을 했다. 흡족하지는 못하지만 몇 자루씩 분배하여 가지고 왔다. 그러나 수확하여 온지 3일 만에 그 귀한 감자를 모두 다 썩혀버렸다. 원인은 밭이 약간 습한 토질인데다 장마가 오래 지속되다보니 수확하여 건조하는 과정에 그냥 썩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누님은 "모처럼 어려운 시간을 내서 심었는데, 모두 다 썩혀서 어떻게 하느냐"며 8월에는 무와 배추를 심어서 보람을 찾으라고 격려를 하셨다. 그런데 매주 일요일이면 비가 내려 심는 적기를 훨씬 넘겼다. 무려 7주나 늦어져서 배추 묘를 사다 심었다. 시기상으로 상당히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뒤늦게 심은 배추는 장마를 겪느라 무던히도 마디게 자라서 친구와 나는 김장용 배추를 기대하지 않았다. 기왕 심은 거니 질경이 포기 같은 배추라도 용도에 맞는 김치를 담자며 한 달에 두 번 정도 배추밭에 가서 들여다보며 비료도 주고 잡풀도 뽑았다.

같은날 심은 배추인데도...
같은날 심은 배추인데도... ⓒ 윤도균
그런데 이상하게도 같은 날 심은 배추 묘인데 어떤 배추는 엄청 빠르게 성장하여 우리들의 기대를 부풀게 하는가 하면 어떤 배추는 배추 묘 상태 그대로였다.

300개의 묘를 심었는데 중간에 시들어 죽고 시원치 않게 자란 포기를 제외하면 그 반수 정도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기상으로 너무 늦게 심어 과연 결구가 될는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시월에 배추밭에 다녀와서는 배추를 보러 자주 가지 않았다.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기도 했지만 매번 인천에서 파주 탄현 통일동산 조성지역까지 달려갈 마음이 없었다.

그러면서 속으론 내가 언제 배추농사 지어서 먹고 살았나? 배추 심어 그곳에 쏟은 정성과 비용, 시간을 따지면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사서 김장하면 그 비용의 반 값이면 김장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체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11월 7일 누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와 배추가 꽤 예쁘게 커서 자랐는데 자꾸만 외지 사람들이 뽑아 간다고 일요일에 내려와서 모두 뽑자고 말이다.

포기김치를 담은 모습
포기김치를 담은 모습 ⓒ 윤도균
나는 일요일은 산행계획 때문에 곤란하고, 그 주 토요일 오후에 친구하고 가서 배추를 뽑겠다고 말씀드렸다. 당일 밭에 도착을 하니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던 무와 배추가 한달 만에 보란 듯이 밭을 꽉 차게 메우고 있었다. 우리들에게 과시라도 하려는 듯. 꼭 배추에게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그런 기분이고, 또한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건장한 청년의 팔뚝이나 종아리 같은 무와 아름드리 배추를 뽑으며 '아마 이래서 농민들이 여름 내내 피땀 흘리는 힘든 노력을 하면서 농사를 짓는 것이구나'하는 일깨움을 주었다.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배추가 연하여 비록 속은 가득하지 않았지만 아주 맛있는 김치를 담글 자료로는 손색이 없었다.

친구의 소형 트럭에 가득히 싣고 와서 분배하니 밤 9시가 다 되었다. 무와 배추를 아파트에 올리고 보니 집안이 온통 배추로 꽉 찼다. 아내와 나는 고민 끝에 오늘밤에 배추를 절여서 내일(일요일) 아예 김장까지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겉저리 김치모습
겉저리 김치모습 ⓒ 윤도균
따뜻한 물을 받아 소금을 풀어 배추를 모두 절이고 나니 자정이 되었다. 이때부터 무를 씻어 채를 썰고, 새벽부터 재래식 시장에 가서 김장에 필요한 재료를 샀다. 그리고 세간 나서 살고 있는 큰아들 내외에게, 이웃에 사는 큰형수에게 김장하자고 연락을 했다.

옛날에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돌아가면서 김장 품앗이를 해서 이웃의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요즘은 아파트 생활을 하다보니 앞집, 윗집, 아랫집 누가 언제 김장을 하는지도 모른다. 설혹 친하다고 해도 김장을 부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 아쉽다.

요즘은 아파트 목욕탕 욕조에 배추를 절여놓고, 거기서 뜨거운 물, 찬 물 마음대로 사용하며 반바지 차림에도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배추를 씻는다.

김치냉장고행 준비완료된 김치모습
김치냉장고행 준비완료된 김치모습 ⓒ 윤도균
채칼로 무를 북북 긁어서 무채를 썰었다. 여자들은 힘이 든다고 무채 속 버무리는 일을 수 년째 남자의 일로 전락시켰다. 나는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예 처가댁 김장하는 날까지 뽑혀 다니며 무채를 버무린다. 하지만 그런 체면쯤이야 나에겐 거추장스런 격식에 지나지 않는다. 연약한 여자들이 꼼지락거리며 배추 속을 버무리는 것보다는 그래도 힘이 좋은 내가 시원스럽게 버무리는 것이 우선 내 직성에 맞기 때문에….

나는 매년 김장 때만 되면 배추 씻는 일, 속 버무리는 일 그리고 이제는 아예 김장 김치 속 싸는 일도 척척 해내고 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배추 속 싸는 일은 아예 못하는 것으로 단정해버리고 뒤로 물러서는데, 기왕 아내를 도와 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참여하여 함께 끝을 내는 것이 진정한 참여이고, 협력이라고 생각해서 속 싸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여성들의 섬세한 솜씨를 따를 수는 없겠지만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한다'고 결혼생활 28년에 김장 참여 20여 년 기간을 이어오면서 이제는 나름대로 나만의 김장 노하우도 가지고 있다. 이제는 혹시 아내가 어디 먼 곳에 여행을 떠나도 나름대로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도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집은 꼭 하루만에 밭에서 크고 있는 싱싱한 무와 배추를 뽑아서 절이고, 김장해서 김치 냉장고에 담기까지 모든 과정을 완벽히 마쳤다. 그리고 아들네와 큰형님댁 김장을 함께 담아 차에 실어 보내고 나니 비로소 부모님 생각이 난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싸주고 싶어하시던 마음을 이제야 체험하게되니 마음이 흡족하며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그리워진다.

힘은 들었지만 올 같은 불경기 고 물가 시대에 특히 김장용 무와 배추값이 만만치 않을 때에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김장을 담아 선물을 할 수 있어서 마음이 흡족하다.

옛날엔 김장하면 반년 농사지었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우리 집이야말로 김치냉장고, 일반냉장고 2개를 온통 김치로 가득 채우고 나니 부자가 된 느낌이다.

국화꽃도 우리집 김장을 축하해 주는듯 만발한 모습
국화꽃도 우리집 김장을 축하해 주는듯 만발한 모습 ⓒ 윤도균
오후부터 비가 그치고 나더니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다. 얼떨결에 김장을 담그고 나니 날씨가 쌀쌀해져도 마음이 편안하고 가볍다.

누님 댁에 전화를 거니 누님도 어제 모두 김장을 담아 시집간 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하시며, 동생이 수고 많았다고 격려까지 하여 주신다.

"누님 고맙습니다. 누님 덕택에 풍족한 마음의 겨울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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