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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등이 걸렸다. 민족화해,남북통일,새명평화라고 새겨져 있고 등을 단 사람의 이름이 각기 젹혀 있다.
평화의 등이 걸렸다. 민족화해,남북통일,새명평화라고 새겨져 있고 등을 단 사람의 이름이 각기 젹혀 있다. ⓒ 전희식
시인이 많았던 날이었다. 김용택은 이렇게 말했다. ‘삶과 죽음이 얼싸 안고 서 있는 산봉우리들’에게 말했다. 다시는 ‘정의니 진리니 생명이니 진실이니 하는 말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정의니 진리니 평화니 하는 이름으로 죽어 간 무수한 생명들에게 면목이 없었던 것이 어찌 시인뿐이었으랴.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 속에서 지리산이 한 해에도 수십 번씩 무너지고 터지고 비틀리면서 내는 통곡소리를 들어왔을 지리산 실상사에서 생명과 평화를 염원하는 결사가 지난 15일 실상사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행사가 되길 거부하고 또 하나의 단체가 되기를 사양하는 자리였다.

지리산 천일기도 회향 천도재 및 지리산 생명평화 결사 창립식

실상사의 밤 하늘을 다 덮어버린 평화의 등불들
실상사의 밤 하늘을 다 덮어버린 평화의 등불들 ⓒ 전희식
1천여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는 새로운 평화운동을 제창했다.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고 했다. 모심과 살림, 섬김과 나눔이 평화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선언했다.

참석자들은 ‘지리산생명평화서약문’을 통해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나눔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청빈하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나의 몸짓, 나의 말 한마디, 나의 뜻 하나가 세상 평화를 이루는 근본임도 확인했다. 내 안의 평화를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깨어 공부하면서 한반도에 전쟁을 방지하고 이 세상 평화를 가꾸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노라고 선언했다.

도법스님은 실상사 주지자리를 내 놓고 수경스님과 함께 1000일 평화의 탁발순례에 나선다고 한다. 생명평화 서약운동을 벌이고 평화의 등불들이 모여 평화 마을 1000개를 만들기로 했다. 평화학교도 세우고 생명평화 독본을 정기적으로 간행하여 평화마을에서 월례 학습을 진행하기로 했다. 또 평화지대를 선언해 나가는 것도 사업의 중요한 계획으로 포함시켰다. 당연하지만 사이버 평화마을도 만들어 평화의 편지 이어쓰기와 평화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했다.

한태주군이 흙피리를 불고 있다. 맑고 청아한 흙피리가 '새소리'를 연주 할때는 새가 떼로 날아 드는 것 같았다.
한태주군이 흙피리를 불고 있다. 맑고 청아한 흙피리가 '새소리'를 연주 할때는 새가 떼로 날아 드는 것 같았다. ⓒ 전희식
이 자리는 짧게 잡으면 3년 만에 이루어진 자리고 길게 보면 반세기 만에 만들어진 자리다. 2001년 2월 16일 범 종교계 합동 100일 기도가 시작되고 그로부터 꼭 100일 되는 날. 지리산 달궁에서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가 열렸던 것이 첫 시작이었다. 이날부터 또 실상사 도법스님은 지리산 천일기도를 시작한다.

지리산의 생태적 가치와 우리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교훈을 그냥 놓칠 수 없다는 생각들이 널리 퍼져가면서 ‘지리산을 사랑하는 열린연대’도 만들어지고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도 만들어졌다. 또 '지리산 생명연대’가 출범하기도 했다.

보따리학교 아이들이 우루루 올라갔다. 창원,서울,속초,부안,울산,완주,곡성 전국에서 온 아이들이다. 노래도 평화였지만 그들 자신이 평화였다.
보따리학교 아이들이 우루루 올라갔다. 창원,서울,속초,부안,울산,완주,곡성 전국에서 온 아이들이다. 노래도 평화였지만 그들 자신이 평화였다. ⓒ 전희식
그렇다. 지리산은 이미 죽은 산인 것이다. 그것은 산맥이 잘리고 숲이 파헤쳐져 댐이 들어섰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인간들의 큰 무덤이 바로 지리산이다. 봄 철쭉이 곱다고 어떤 날은 수십만의 행락객들이 등산로를 가득 메우지만 바로 그 길들과 산 둔덕은 공동묘지와 다를 바 없다.

토벌대와 빨치산이 지나간 길목마다 웅덩이가 파지고 떼로 살육당한 주검들이 가득 채워졌다. 그래서 한반도의 생명평화 결사가 지리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행사 의장을 맡았던 이병철 녹색연합 대표는 "모든 사람들이 대표이고 모두가 하나씩 등불이 되는 운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평화의 등불들이 주체가 되어 1년에 한번씩 지리산에서 평화대회를 열고, 평소에는 평화마을과 평화지대에서 촌장회의가 열릴 것이라 밝혔다. 끝으로 평화마을은 직장에도 생기고 사찰이나 교회, 단체별로도 만들어 질 것이라고 전했다.

물론 이라크 파병 반대 선언도 있었다. 살기등등한 그런 선언이 아니었다. 자애와 사랑의 선언이었다. 노무현 정부에 호소했다. 우리처럼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피 눈물을 흘려온 민족이 터무니없는 국익논리로 파병을 감행한다면 일제의 36년 식민강점을 어떻게 비판하겠냐고 되묻기도조차 했다. 인류애의 길, 희망의 길로 가자고 호소했다.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들은 잘 놀았다. 명상춤 시간에 무대에 올라 가 신나게 놀았다.
실상사 작은학교 학생들은 잘 놀았다. 명상춤 시간에 무대에 올라 가 신나게 놀았다. ⓒ 전희식
이날의 행사에는 '길동무'에서 진행하는 ‘보따리학교’ 사람들이 40여명이나 와서 3일간 함께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초·중·고 나이로 구성된 보따리학교 학생들의 참여는 이 행사의 의미를 한층 돋보이게 했으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행사 이틀 전부터 모여 든 이들은 이미 4개의 농가에 분산되어 3일 동안 농사체험과 지리산 평화를 주제로 하는 보따리학교 1부를 진행하고 왔던 것인데, 생명평화의 등불달기와 피켓 만들기, 깃발 만들기, 행사장 마련 등에 고사리 손을 보탰다.

본 행사에서는 합동으로 축가를 불러 감동을 자아냈으며 보따리학교 자체적으로 천성산과 지율스님 살리기 모금을 하여 13만여원을 주체 측에 전달하고 '길동무'에서는 20만원의 행사 성금을 별도로 내기도 하였다.

행사 전날 모금통도 만들고 피켓도 만들고 평화의 등불도 달고 노래 연습도 한 보따리학교 아이들
행사 전날 모금통도 만들고 피켓도 만들고 평화의 등불도 달고 노래 연습도 한 보따리학교 아이들 ⓒ 전희식
평화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는 박노해 시인이 시를 낭송했고, 이어 지리산 흙피리 소년 한태주군이 새로 만든 노래 바람, 새소리, 하늘을 연주하여 지리산의 밤을 맑고 투명하게 여며 주었다. 마지막 순서는 거의 밤 9시가 된 때였다.

오랜 시간 진행된 마지막 순서는 은빛늑대 김용량과 함께 한 춤명상 시간이었다. 어린이와 어른, 스님과 수녀, 남녀가 함께 생명을 노래하고 평화를 외치는 집단 춤추기는 지리산 자락을 터지는 환호와 기쁨으로 감쌌다. 손가락 하나를 맞대고 눈을 감은 상대를 이끌어 가는 춤은 참석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 군무가 발산하는 힘과 신명은 어마어마했다.

평화의 등불에는 한 사람 한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수 천 개의 평화의 등불들이 실상사 허공을 빈틈없이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일주문 앞에까지 달려 있었지만 단 하나도 같은 등불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확인하니 놀라움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미 등불을 달았다는 친구의 이름을 찾아 거닐어 보기도 했다.

모든 참석자들이 함께 춘 명상춤추기. 열기와 힘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모든 참석자들이 함께 춘 명상춤추기. 열기와 힘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 전희식
행사장에는 평화가 가득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옛 지인들을 만나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평화였고 행복이었다. 이것이 평화로구나 만끽한 실상사에서의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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