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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지구영웅전설>
책 <지구영웅전설> ⓒ 문학동네
"<지구영웅전설>은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라는 매우 묵직한 주제를 만화라는 대단히 가벼운 양식을 차용해 천착한 작품이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 미국이 창조한 지구적 영웅들의 활약상을 뒤집어 봄으로써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전 분야에 걸쳐 가속화되고 있는 '미국의 세계 지배 전략'의 실체를 폭로하고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칫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도 있는 이러한 내용을 '참을 수 없는 만화의 가벼움'에 실어 전달함으로써 한 편의 유쾌한 소설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 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

이 책은 올해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새롭게 부각되는 작가 계열로 등극한 박민규의 또 다른 소설이다. <삼미...>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제 8회 문학동네 신인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인 만큼 문학적 새로움을 갖추고 있다.

작가는 만화처럼 전개되는 스토리를 통해 미국이 창조한 지구적 영웅들의 활약상 속에 담긴 미국의 패권주의를 폭로하고 문제점을 고발한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바나나맨'은 '겉은 노랗지만 속은 희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이름 속에는 백인을 닮고 싶어하는 황인종에 대한 냉소가 담겨 있다.

주인공은 플레이보이 잡지를 봤다는 이유로 부모님과의 면담을 요청한 선생님의 꾸중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하는데, 그러한 그를 구출한 것이 바로 슈퍼맨이다. 슈퍼맨을 이 세기를 이끌어갈 진정한 영웅으로 믿고 있는 주인공은 슈퍼맨의 추천으로 지구 방위대에 편입되고 지구를 지키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지구를 지키는 진정한 지구방위대원이 되지 못하고 언제나 수퍼맨, 배트맨의 햄버거와 원더우먼의 생리대 심부름을 하며 영웅을 보조하는 존재로 남는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미국을 선망하고 추종하는 멍청한 사대주의적 인간들을 상징한다.

"소련이 죽었으니까. 그건 곧 나도 사라지는 쪽을 택해야 한다는 얘기야. 힘의 대립은 끝이 났다. 이제는 또다른 이름의 정의가 필요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니?"
"모르겠어."
"그러니까 내 말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정의도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얘기야."
"어려운데."
"그럴 거야. 황인종의 머리로는 풀기 힘든 문제지. 오, 미안. 농담이야. 너의 본질이 희다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걸. 그치?"

작가는 슈퍼맨과 그를 둘러싼 다른 만화적 영웅들,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을 통해 미국 우월주의에 물든 어리석은 미국인들을 풍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의 사도이며 지구를 지키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헛된 맹신을 다른 국가에게도 주입하려 하며 복종을 요구한다.

거기에 적절히 복종하는 바보 같은 존재가 바로 바나나맨이다. 그의 맹종적 행동은 미국을 추종하는, 바나나처럼 겉은 황인종이면서 속은 백인이길 희망하는 한국의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풍자이다. 그런 바나나맨에게 슈퍼맨은 일침을 가한다.

"넌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그럼 미국인이 될 테야." 내가 소리쳤다.
"소용없어."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그런다 해도 넌 백인이 아니니까."

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한국인은 누구일까? 그는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일한다. 그리고 그 학원에는 '알'을 될 수 있으면 'R'과 가깝게 발음하려고 애쓰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다니고 있다.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란 미국이라는 지상 낙원으로 이민을 가 사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바나나맨은 슈퍼맨을 다시 만난다. 슈퍼맨은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고 알린다. 그 적이란 바로 '제 3 세계 민족주의'라는 놈들이다. 그리고는 바나나맨에게 이야기한다.

"딴 건 필요 없고, 열심히 응원이나 해. 포즈나 확실히 잡아주고 말이야."

이 마지막 한 마디는 미국이라는 패권주의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에 대한 풍자이다. 우리는 그저 미국이 때려부수고 있는 '제 3 세계 민족주의'라는 나쁜 놈들에게 포즈만 취해 주면 된다. 그리고 위대한 미국과 정의의 사도 슈퍼맨을 향해 파이팅을 외쳐 주는 거다.

우리가 '바나나맨'으로 살아갈지, 아니면 슈퍼맨과 미국의 패권주의에 저항할지는 우리 자신이 선택해야할 몫이다. 이라크 파병과 관련하여 많은 논란이 거듭되고 있는 요즈음, 바나나맨처럼 슈퍼맨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바나나맨처럼 정체성을 상실한 채 백인이 되고 싶은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문학동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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