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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Travis)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2집 'The Man Who'가 실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막 라디오헤드(Radiohead)의 세 번째 음반 'OK Computer'(1997)의 이상 열기가 지나간 시점에서, 라디오헤드와 같은 프로듀서-나이젤 갓리치(Nigel Godrich)를 기용하고 흡사 톰 요크(Tom York) 같은 목소리에 우울함으로 가득한 선율로 중무장한 트래비스의 새 음반은,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호들갑스러운 영국 언론의, 소년 소녀들의, 그리고 바다 건너 미국 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언제 트래비스를 떠받들었냐는 듯 콜드플레이(Coldplay), 도브스(Doves), 스타세일러(Starsailor)와 같은 새로운 우상-희생양-이 거듭 등장했던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이들은 약간의 변화를 가한 세 번째 음반 'The Invisible Band'(2001)를 내놓았지만, 이미 밴드에게는 '아류'라는 딱지-굴레-가 덧씌워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즈음 -드러머 닐 프림로즈(Neil Primrose)의 사고가 발행한다. 이것은 겉보기에는 악재였으나, 트래비스라는 한 밴드의 장래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호재였다.

드러머의 중상으로 인한 본의 아닌 공백 기간은, 밴드에게 자신들이 저한 상황을 반추해볼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기간 동안 자신들에게 자의반 타의반 덧씌워진 라디오헤디즘(Radioheadism)의 굴레를 벗어던지는데 동의한다. 비로소 그 누구의 아류 -제 2의 라디오헤드- 가 아닌, 트래비스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새 음반 '12 Memories'(2003)는 그런, 트래비스로서의 트래비스를 온전히 증명하는 앨범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 라디오헤드와 버브(The Verve)의 중간에 놓인 사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젤 갓리치가 프로듀싱을 맡지 않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톰 요크를 추종하는 보컬도, 'The Bends'(1995) 음반의 서정적인 측면만을 끄집어낸 듯한 선율도 이제 없다.

물론 이 음반이 트래비스라는 밴드의 성격을 완전히 재정의하게 만들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 음반은 기타를 주조로 한 -우울한 멜로디의- 팝·록 음반인 것이다.

특히 전형적 트래비스 음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첫 싱글 "Re-Offender"나, 매력적인 첫 트랙 "Quicksand", 그리고 음반 뒤안에 감추어진 동명 타이틀곡 "12 Memories"가 대표적이다. 특히 "Peace The Fuck Out" 같은 곡은 올 시즌 영국 기타 팝 계열에서 단연 최고의 싱글이라 할 만한 곡이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일련의 기타 팝 넘버들이 최대한 '단순'하게 꾸며져 있다는 점은, 이들의 유려한 선율 감각과 '기억'을 매개로 한 노랫말을 한껏 부각하는 기능을 한다. 실제로 음반에 실린 12개의 노래들은 멤버들의, 혹은 밴드의 특정한 기억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이 또한 하나의 음반으로서 일관성을 부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음반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의 강력한 팝 넘버들의 동어반복이라는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음반의 분위기에 우리가 익숙해진 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렇다고 후반부의 곡들이 전반주 곡들에 비해 못 미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분명한 것은, 밴드에 '재앙'으로 여겨졌던 사건이 결과적으로는 트래비스라는 밴드를 새롭게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트래비스는 누구의 아류로 불릴 필요도 없게 되었다. 굴레를 벗어 던지고, 트래비스인 트래비스로서 '데뷔'한 이들이, 앞으로 펼쳐 보일 음악 세계가 기대된다. 아마도 그것은, 더없이 아름다운 기타 팝/록의 세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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