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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우 시인
ⓒ 김경희
김선우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이 2003년 10월 25일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집은 생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빚어지는 깨달음으로 가득하다. 서른 세 살을 넘긴 시인의 목소리가 선사의 설법을 경청하는 듯 오묘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험한 비탈길과 같은 삶의 허방에서 그가 들려주는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는 한마디 일갈이 우리 삶이 맞닥뜨리는 절망과 죽음을 희망과 소생 쪽으로 밀어붙인다.

인분을 받아먹고 사는 돼지가 거처하는 '통시'를 시인은 '신(神)의 방'이라 부르며 '생명은 생명에게 공양되는 법이라 행여 남아 있을 산 것들의 온기가 더럽고 하찮은 것으로 취급될까 두려운 때문이 아니었는지 몰라…똥누고 먹는 일이 한가지'라는 생각을 펼쳐내 '내 몸 속의 방'을 채워 보이기도 한다.

「매발톱」에서는 야생화의 죽음을 '사람에 의해 이름 붙여지는 순간/사람이 모르는 다른 이름을 찾아/길 떠나야 하는 꽃들이 있다'고 인식한다.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속이 꽉 찬 배추'를 보고 '땅에 가까운 잎 몇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이타적 헌신을 통해서만이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다며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들려준다.

'…열리다/닫히다/열리다/닫히다/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 수련을 폐경의 엄마로 환치시켜 놓고 불교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마지막의 절묘한 외침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폐경이라니, 엄마,/완경이야, 완경!'에 이르러서는 당당함까지 느끼게 한다.

그의 시는 언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아름답다.

구름 상여 지나간다
하늘은 겹겹 절벽
口音처럼 자란
늙은 진달래나무
절벽 끝으로 저를 밀어낸다

누군가 저 여자를 건져야 한다
절개한 뱃속처럼 내장이 환히 드러난
저 발화(發火),
진달래 꽃잎들
일제히 활짝 열리고
낭떠러지가
붉고 비린 꽃 속으로 들어간다

생리혈 가장 붉은 월경 둘째날
허공을 디디고 선 내 몸의 벼랑으로
진달래나무가 건너온다

아가야, 달래다오
절벽 끝으로 저를 밀고 가
절벽을 받아 안는 저
늙은 여자의 말을
-「절벽을 건너는 붉은 꽃」전문


▲ 시집 표지
ⓒ 김경희
'아가야, 달래다오', 되뇌면 되뇔수록 우리말의 눈부신 미감이 살아나는 구절이다. 생산의 고통에 무감각한 남성에게 모성이 겪는 아픔을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깊게 그려서 일깨운 작품은 아마 없을 것이다.

위태로운 '절벽'과 붉은 '진달래나무'와 여성이 생명의 창조자로서 감당해야 하는 아픔인 '허공을 디디고 선 내 몸의 벼랑'을 하나로 통합시켜 미학적으로도 빼어난 작품을 낳고 있다.

이 시집의 표제시인 「도화 아래 잠들다」를 읽다 보면 지금까지 그 어떤 화가도 그리지 못한 명화를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부끄러움이 오히려 아름답게 빛나는 호흡 속에 독자의 의식을 가두어 마비시키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또한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거나 어두운 삶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인간과 사회를 연민하고 따뜻하게 보듬는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탁란」,「백설기」,「감자 먹는 사람들」,「불경한 팬지」,「우리 동네엔 산부인과가 다섯 개나 있다」,「범람」등이 그 경우라고 생각한다.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으로 여성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우리 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여 올렸던 김선우 시인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작품들의 푸른 물 속 깊이를 다 헤아려 낼 수는 없지만 그의 첫시집의 울림을 기억하는 이들과 함께 다시 한번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

끝으로 그의 표제시 「도화 아래 잠들다」를 덧붙인다.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이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김선우 시인은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1996년 『창작과비평』겨울호에 「대관령 옛길」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첫시집으로『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0.2.창작과비평사)이 있으며, 산문집『물 밑에 달이 열릴 때』(2002.3.창작과비평사)와 어른들이 읽는 동화『바리공주』(2003.8.열림원)를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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