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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지리에서-내 친구 김기운>(2003)
<다시 오지리에서-내 친구 김기운>(2003) ⓒ 이종구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한 것은 서울시립미술관에서였다. 우연히 들렀다가 만난 작품이 <고부에서 여의도까지>(1989)였다. 산만하기만 했던 시선은 한쪽 벽면에 걸려있던 그 세밀한 그림에 자연스레 꽂혔다.

동학농민운동을 암시하는 ‘과거’와 수세 제도의 불합리성 즉 ‘현재’를 말하고 있던 <고부에서 여의도까지>. 고부에서 농민들이 항쟁을 일으켰던 1894년과 그가 이 작품을 그린 1989년의 간극이 100년에 가깝지만, 결국 농민의 처지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음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주제 못지 않게 눈길을 끈 것은 진실성. 그의 작품에서는 농민에 대한 절절한 마음씀씀이와 성실함이 은연중 묻어나고 있었다.

‘쌀부대 화가’로 잘 알려져 있는 이종구의 개인전 《국토》가 서울 소격동 학고재 화랑에서 열리고 있다. 현직 미술교사로 일하며 틈틈이 작업한 것을 모아 6년만에 갖는 개인전으로, 종전의 작품들이 농부 개개인에 주목하고 있던 데 반해 이번에 공개된 작품들은 들판과 조국 산하에까지 시선이 확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회는 11월 4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화가의 고향이기도 한 충남 서산의 오지리 사람들을 쌀부대와 장지에 그려오던 이종구 화가. 그는 오지리 사람들을 넘어 땅과 들, 백두대간으로까지 시선이 확장된 데 대해 “희망을 갖고 농촌을 그렸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 버렸다”며 “하지만 여유를 갖고 든든한 생명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다”라고 말한다.

"큰 틀에 있어서의 주제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땅과 생명의 개념을 조금 더 확장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인간 개인에서 나아가 노동의 흔적과 노동의 대상, 즉 땅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실존 인물을 직접 그리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리는 것이다. 우리 국토의 자연과 삶을 총체적으로 구성해 보고 싶다.”

그의 작업은 지난 2000년 다녀온 중국 여행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당시 작가 및 지리학자들과 함께 다녀온 압록강과 백두산, 두만강의 기억은 우리의 국토에 깃 들어 있는 생명력에 대한 꿈을 작품으로 드러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한편 지난 8월 이라크에 다녀온 이 화가는 11월 4일부터 9일까지 인천 신세계 갤러리에서 《주인을 찾습니다》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관련 전시회를 가질 예정이다.

'쌀부대 화가' 이종구
'쌀부대 화가' 이종구 ⓒ 권기봉
“이라크 사람들 역시 우리 농민들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어쩌면 이라크는 더욱 절실한 현재의 문제일 수 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상처를 역사에 기록하고, 세계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호소하고자 한다.”

우리 농촌의 처절한 현실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일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앞에서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하니 <다시 오지리에서-산불>(2003) 앞에 가서 서는 이종구 화가. 다음은 학고재 화랑에서 있었던 이종구 화가와의 인터뷰를 간추린 것이다.

- 6년 만에 갖는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무엇인가?
“20년 가까이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하는 농민을 그려왔다. 이번 작업은 그 연장이면서 동시에 희망을 재발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지금 농촌은 너무나 황폐화되어 버렸다.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림을 통해 땅의 생명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의 철학적 가치와 희망을 그리고 싶었다. 생명을 순환시키는 땅의 건강함을 우리 국토를 통해 그려내고 싶었다.”

- 유독 농민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버지가 오지리에서 농사를 지었던 영향도 있겠지만, 특히 농민에게 집중하게 된 것은 80년대라는 한국의 상황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시대의 모순을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들을 기록하고 형상화해서 고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념으로만 흐를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농민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택한 것이 바로 고향 오지리다.”

-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들이 고향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인데, 모델료는 냈나?
“(웃음) 여기 등장하던 농부들이 이전에는 어른들이었는데, 이제는 내 친구들이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모델료는 주지 못했다. (웃음)”

- 화가는 ‘쌀부대’ 화가로 잘 알려져 있다. 캔버스를 놔두고 쌀부대나 장지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흙이 묻어 있는 사람을 그렸다. 그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릴 때 가장 유기적으로 연관성이 높은 것이 쌀부대다. 그것은 그들이 더운 여름에도 땀 흘리며 노동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농부를 그리는 데에는 근사한 캔버스보다 쌀부대가 맞다.”

- 작품 속에 몸빼나 삽, 낫 등 농촌에서 쉽게 볼 수 있던 물품들이 등장하는 이유도 그것인가?
“그것이 바로 일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의복이고 도구가 아니겠는가? 월급봉투나 호적 초본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결국 우리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들 아니겠는가.”

- 그런데 이렇게 극사실화에 집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기법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노동이라고 본다. 한 작품을 위해 아주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면서 땀을 흘릴 때의 향기가 있다. 또 ‘잘 그렸다, 못 그렸다’를 떠나 최소한 ‘저 사람은 열심히 그렸구나’하고 느낄 정도로 작업했을 때의 보람은 말로 하기 힘들다.

요즘에는 사실 특이한 소재를 쓰거나 해서 ‘효과’에 기대는 화가들이 많다. 그러다가는 자칫 사기를 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나는 그런 것을 경계하는 입장이다. 신뢰감을 주는 미술 효과보다는 리얼리티로 호소하고 싶다. 농민들이 일하며 땀 흘릴 때 화가도 땀을 흘려야 한다고 믿는다. 또 그렇게 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겠나? 또 효과의 면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관객과의 대화가 더 용이하기도 하다.”

“생명력을 이야기하고 싶다”

- 그러나 그간의 작품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이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비극이 환희를 압도하는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 비극이 실제 우리 농촌의 현실이라고 보면 된다. <다시 오지리에서-산불>(2003)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등장하는 사람들이 다들 늙고 노쇠했다. 산야가 산불에 타 들어가지만 어떻게 힘을 쓸 수 없어 망연자실해 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도 오른쪽 아래 부분 일부에는 불타지 않고 마른풀을 남겼다. 그 정도의 마른풀, 즉 아직 타버리지 않은 작은 부분이 우리 농촌에 겨우 남아 있는 희망이라는 얘기다. 그게 현실인데 비극적일 수밖에 없지 않나? 그나마 상처 난 땅에 저 정도 희망의 단초는 남길 수 있는 여지를 두고 싶었다.”

<다시 오지리에서-산불>(2003)을 배경으로 선 이종구 화가
<다시 오지리에서-산불>(2003)을 배경으로 선 이종구 화가 ⓒ 권기봉
- 그래도 국가들간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논의가 증가하는 것에 비례해 농촌의 현재는 점점 각박해져 가고 있지 않나? 화가는 우리 농촌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나?
“나는 농촌이나 농민을 그릴 때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렸다. 그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풍요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작업을 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세상은 희망과는 정 반대로 흘러버렸다. 그림을 그릴 때에는 희망을 가지고 그렸는데, 실제의 농촌은 그 사이 더 황폐해졌다.”

- 이제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의미인가?
“옛날에는 희망이 있었지만, 요새는 그 희망이 솔직히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림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었다. 그림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게 쉽지 않구나 하고 한편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더 희망을 얘기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비극적이고 초라한 얼굴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숨어 있는 생명력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화가들에게는 세상이 불행할수록 할 일이 더 많은 게 아니겠는가.”

“인간 개인에서 나아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그리고 싶다”

-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 나온 작품들은 이전의 것들과 비교할 때 차이가 느껴진다. 뭐랄까, 희망의 메시지를 주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는 현장 취재를 통해 사회적 약자인 농민들의 생생한 인생 리얼리티를 그리는 데 집중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소 추상화된 생명이랄까,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휘둘리고 있는 우리 것을 지키고 생명력을 찾기 위한 작업을 했다.

보다시피 요즘 작업하는 작품들에는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인간 그 자체보다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장과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암시하는 내용이 이번 전시의 주를 이루고 있다.”

- 처음에는 정물에 시선을 두다가, 84년부터는 농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 같다. 그런데 요즘에는 더 나아가 자연이나 국토로 시선이 훨씬 넓어진 느낌이 든다.
“큰 틀에 있어서의 주제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땅과 생명의 개념을 조금 더 확장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인간 개인에서 나아가 노동의 흔적과 노동의 대상, 즉 땅을 그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실존 인물을 직접 그리는 것이 아니라 왜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리는 것이다. 우리 국토의 자연과 삶을 총체적으로 구성해 보고 싶다.”

“그림을 통해 소통할 수 있어야”

- 그런데 화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직설적이라는 지적이 있다. 다시 말해 관객들에게 농촌 문제의 부조리 해결 등에 대해 강요를 하고 있다는 지적인데.
“나 역시 너무 친절한 설명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한편으론 우려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누가 내용적인 면에서 편향적인 강요를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면, 이런 강요는 백 번 천 번 해도 옳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오히려 한 쪽의 목소리만 너무 크지 않았나. 예를 들어 요즘 하는 시위만 해도 아무리 이야기하고 떠들어도 보수 기득권층이 눈도 깜짝 안 하지 않나.”

<국토-福>(2003)
<국토-福>(2003) ⓒ 이종구
- 듣기로 사적인 자리에서 미술인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인가?
“근래 들어서는 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80~90년대까지만 해도 미술가들이 인사동 밖에는 시선을 두려 하지 않았다. 당시 적지 않은 미술인들이 귀족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림을 통해 보통 사람들과도 적극적인 대화를 할 수 있어야지, 그림이라는 것이 소위 교육받고 교양 있는 특정 계층을 위한 고급문화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화가가 보는 요즘 우리 미술은 어떤가?
“지나친 서구화 일색이다. 서구의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과 우리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되고 있다. 또 요즘 들어 미술도 디지털로 전환이 되면서, 그것이 앞서가는 미술 형식으로 굳어지고 있는 추세다. 그러나 세계화나 디지털화라는 것도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 나름의 줏대를 세워야 한다. 근본도 없이 서구의 도구와 서구의 시각만으로 우리 것을 표현한다면, 그들이 보고 웃지 않겠나? 그것은 아류일 뿐이다. 서구와 우리의 차이를 인식한 이후에 나름의 특성을 살리도록 해야 한다.”

- 작품 활동을 하면서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작업을 하면서 현장 취재와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이라크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가기 전에 반전과 관련한 작품을 하나 만든 것이 있다. 이라크전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아랍 세계를 찍은 사진들 위에 아랍어로 된 맥도날드 간판 사진을 붙이고 붉은 피가 흐르는 식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요르단이나 쿠웨이트만 해도 맥도날드가 있던데 막상 이라크에 가보니 거기에는 맥도날드가 아예 없더라. 이런 것이 바로 취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흐른 결과가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라크는 더욱 절실한 현재의 문제다”

- 요즈음 2차 파병 문제로 국내 여론이 시끄럽지 않나. 지난 8월 다녀온 이라크 이야기를 해달라.
“국익이라는 미명으로 파병한다는데, 그렇게 비굴한 국익이 아니라 떳떳한 국익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이라크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어린이와 어른들이 섞여 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보니 화내거나 찡그린 얼굴이 하나도 없더라. 이렇게 맑고 순수한 사람들한테 우리가 총을 들고 간다니, 문명의 양심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는 것 아닌가?

깨져도 파편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 집집마다 유리창에 ‘X’자로 테이프를 붙여놨더라. 그런데 이라크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사이를 순찰하는 미군들 표정에서도 불안과 공포가 읽혀졌다. 그런데 그들도 전쟁과는 무관한 일개 20대 청년 아닌가. 어쩌면 우리나라의 의경이나 전경들처럼 미군들 개개인 역시 권력의 또 다른 희생자가 아닌가 한다.”

- 그와 관련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라크 사람들 역시 우리 농민들처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농촌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넘어서서 인류의 보편적인 상처를 목격했다. 이제 그 모습을 알리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닐까 한다.

어쩌면 이라크는 더욱 절실한 현재의 문제일 수 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의 상처를 역사에 기록하고, 세계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 호소하고자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작업한 것으로 전시회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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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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