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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용사, 탈북자, 북한 이주민, 그리고 최근에는 자발적 이주민, 정치적 망명자까지. 어린 시절 '귀순 용사'라며 탈북자를 보도했던 언론의 호들갑스러움은 사라졌지만, 북한 주민의 탈북 행위는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고, 중국 등에서 또 다른 국제 문제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한국 사회 유입도 증가하고 있고 2002년부터는 지역 사회로의 편입도 늘고 있는 실정이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또 하나의 조국 한국 땅을 밟은 북한 이주민들이지만 이 속에서 정착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남이가> 시리즈는 대구 속 북한 이주민의 삶을 그대로 조명한다. 편협한 정보, 삶의 방식·문화·정서적 차이로 인해 쌍방이 공존할 수 없는 현실 자체를 담론이 아닌 생활 모습으로 나타내고자 한다.

가장 폐쇄적인 도시라고 하는 대구에서 서로 다른 우리가 '공존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 <우리가 남이가> 시리즈가 조금이나마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편집자주>


현재 대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 이주민은 120여명. 하지만 이들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진 미공개는 물론 일체 신분 노출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북에서의 생활을 캐묻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을 듣고 싶다는 설명도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북한 이주민'이라는 이름보다 '대구 시민'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은 이들에게 인터뷰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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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속 북한이주민 - 그들을 알고 싶다

북한이주민센터와 한국복지재단 종합사회복지관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인터뷰 대상자 섭외에 고심하던 중 '선뜻'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2002년 네 가족과 함께 대구를 찾은 최기영(42·가명)씨와 99년부터 대구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박철민(32·가명)씨가 그들이다.

"힘든 생활이지만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이주 2년차 북한 이주민 최기영씨


지난 2002년 6월 처와 두 딸과 함께 대구 생활을 시작한 최기영씨는 남측 생활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이제 시작이니 아직 뭐라 말하기는 이르다는 것.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최씨는 "사람들이 빠르게 말을 하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면서 적응 초기를 회상했다.

택시 타면 듣는 질문 "어디서 왔어요?"
북을 지나치게 '낮게' 보는 질문은 난감


아직 북측 억양이 남아있는 최씨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어보는 사람들은 없냐고 하자 "택시를 타면 그 질문을 많이 듣는다"고 답했다.

"북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에 대해 이것 저것 많이 묻는데, '북한이 실제 그렇게 못 사냐?'는 질문이 제일 많은 편이다. 사실 남에 비해 북의 생활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북한을 '낮게' 보는 질문을 들으면 솔직히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꼬치꼬치 캐묻는 게 귀찮을 때면 그냥 '강원도 속초'에서 왔다고 할 때도 있다.(웃음)"

최씨에 따르면 북에도 '있을 건' 다 있지만 단지 돈이 없어서 사지 못하는 것 뿐이란다. 또한 그는 "북한은 연애도 못하는 줄 생각하는데 나도 자유 연애해서 결혼했다"면서 북에서도 일상적인 삶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북에서 왔다'는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고. "서부 정류장에서 택시를 탔는데 상인동 집까지 요금이 2만원 정도 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부러 빙빙 돌아서 요금을 올린 것이었다"고 경험담을 전한 최기영씨는 "당시는 기분이 나빴지만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많다고 믿고 있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보였다.

취업·직장 적응 힘들어
"하루 빨리 적성에 맞는 일 가졌으면"


대구에서 생활한 지 1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최기영씨는 3∼4개의 직장을 전전했다. 배운 것이라고는 '탄광일'밖에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는 것이다.

"일에 서툴러 긴장하고 있는데 동료들이 나를 보며 웃으면 '비웃는다'는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참지 못하는 개인적인 성격에도 문제는 있겠지만, 나뿐 아니라 대개의 이주민들이 직장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강원도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타보고, 공사판 일용직(일명 노가다)도 해봤다는 최씨. 두 딸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해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다는 그는 사무실에 앉아있는 정적인 일보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운송업 등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마흔이 넘은 그가 입맛에 맞는 직장을 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기영씨는 "경기 불황으로 '사오정'이란 말이 공공연히 떠도는 정도니 취업이 쉽지 않다"면서 "적성에 맞는 일을 하고 싶은 욕심이 크지만 무엇이라도 배워야 할 것 같아서 요즘은 컴퓨터 학원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컴퓨터 배우는 것이 만만치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중년 아저씨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대구시민 위해 봉사하는 것 당연"
이주민모임 '온누리회' 한달 한번 봉사 활동


"성격 다른 두 딸, 각자에 맞는 생활"

네 식구가 함께 이주해 주변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는 최기영씨는 "나나 처에 비해 두 딸은 적응이 빠른 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딸은 현재 다른 교육을 받고 있다.

"작은 딸 혜지(11·가명)의 경우 성격이 밝고 활발해서 친구도 많고 적응도 잘한다. 반면 부드럽고 내성적인 혜영(16· 가명)은 학교 생활을 많이 힘들어 해 현재 천안에 있는 '하늘꿈 학교'(북한이주민 대안학교)에 다니고 있다."

처음 혜영이가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최씨는 달래기도 하고 얼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딸이 완강하게 버티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 학교를 찾아 선생님과 상담을 했단다. "성격 탓도 있었지만 소위 말하는 '왕따'를 당한 것 같았다. 공부는 계속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길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혜영은 '하늘꿈 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혼자 천안까지 보내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기영씨는 혜영이를 데리고 하늘꿈 학교를 방문, 교장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기숙사·식당 등을 꼼꼼히 둘러본 후 입학을 허락했다. 다행히 혜영이는 그 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방학이나 휴일을 이용해 집에 오고 있다고 한다.

비록 네 식구가 한 집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는 최기영씨는 "지난 여름에는 부산 태종대로 휴가를 다녀왔다"면서 즐거운 한때를 회상했다. / 위정은
타지에서의 외로운 생활, 무엇보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큰 의지가 되는 터. 이에 지난 5월 대구지역 북한 이주민들은 '온누리회'라는 자치 모임을 만들었다. 몇몇이 모여 밥 한끼 술 한잔 나누며 친목도모를 하던 중 정식으로 모임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이주민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정부나 기관에서 미처 신경 써주지 못하는 부분을 '선배' 입장에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컸단다.

"생활 자체가 너무 다르다보니 처음 와서는 도움을 받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설명하는 최기영씨는 같은 처지에 있어 본 사람들이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전체 회원 모임은 '너무 자주' 가지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했다. "가끔 만나서 위로하고 정을 나누는 것은 좋지만, 우리끼리만 똘똘 뭉쳐서 그러면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온누리회는 친목 도모를 넘어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대구 지역 양로원을 방문하고 있는데 운영자나 노인분들 모두 반가워한다고. 최씨는 "국민 세금으로 보조금을 받는 우리가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각자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물론 봉사 활동 또한 우리가 해야 하는 몫"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그는 '자식이 있는 분'들이 양로원에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 일축하면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것은 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그냥 무덤덤하게 사는 거죠."
이주 5년차 북한이주민 박철민씨


평범한 늦깎이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박철민씨. 그는 올해로 이주 5년 차 북한 이주민이다. 박씨는 "어린 나이에 온 것도 아니고 20대 중반에 이주를 결정한 만큼 힘든 것들을 견뎌낼 책임이 있는 거 아니냐"면서 "무덤덤해지지 않으면 많은 것들이 힘들기 때문에, 애써 고민하지 않고 일일이 신경쓰지도 않는다"고 자신의 남한 사회 적응 방법을 설명했다.

북에서의 학력 인정돼 의대 편입
이미 굳어진 의학 용어 북측도 외래어 사용


박씨는 의대에 어떻게 들어가게 됐는지를 묻는 질문에 "북에서 의과대학에 재학했던 학력이 인정돼 편입이 가능했으며, 의학 공부에 필요한 원서 이해 능력 테스트와 오럴 테스트를 치렀다"고 답했다. 이어 입학 시험 준비 기간 동안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냐고 묻자 "영어가 제일 어려워서 영어 공부를 비교적 많이 한 편이었으며, 학원을 다니지는 않았다"며 "다행히 서면 테스트가 없어서 비교적 수월하게 입학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어렵다는 의대 편입을 이뤄냈지만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이에 박철민씨는 "학생들이 우수했다. 본인은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도 많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면 될 줄로 알았지만 어느 정도 한계를 느꼈다"고 편입 직후 소회를 회상했다. "말수도 적고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라 발표 수업이나 토론 수업에 가급적이며 참석을 하지 않으려 하기도 했었다"며 입학 초기에 이주민으로서의, 편입생으로서의 적응이 버거웠던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보다 순우리말을 많이 쓰고 있는 북에서 의대를 다녔던 것이 외래어 사용이 많은 의학과 전공에 힘든 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없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박철민씨는 "최근 남한에서도 국시를 칠 때 우리말 의학 용어를 사용한다는 계획이 일부 발표된 적이 있는데, 억지로 끼워 맞춘 우리말 용어는 낯설 뿐 아니라 오히려 불편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북에서도 이미 굳어진 의학 용어는 외래어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말이 달라 힘든 점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구가 특별히 보수적? 오히려 나랑 맞는 듯"
졸업 후 사회 봉사하고 싶어


한편 대구에서 4년여를 살아오면서 대구의 보수성에 대해 느낀 것은 없는지 물어봤다. 이에 대해 박씨는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것과 일상 생활이 보수적인 것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는데 정치적인 것은 매스컴이나 등등을 제대로 관심 있게 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일상 생활에 관해서 그는 "남에 온 이후 서울과 대구에서 생활해 봤다. 서울에서 그다지 많은 사회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울과 비교해) 대구 지역 사람들이 특별히 보수적이라고 느낄 만한 지표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한 박철민씨는 "내 성격 자체가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편이라 오히려 대구 사람들의 다소 무뚝뚝한 성격과 잘 맞는 것 같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힘든 의대 공부를 여느 의대생들과 다를 바 없이 해내고 있는 박철민씨. 몇 년 뒤면 '의사 선생님'이 될 그에게 졸업 후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사'라는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졸업 후 의사가 되겠지만 이 사회에서 내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거주 연차 늘수록 '지역민'으로 거듭나는 이주민

북한 이주민 생활 적응을 지원하고 있는 단체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적어도 1년 이상은 지나야 적응 여부를 거론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취업은 물론 기본적인 생활 적응에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최기영씨또한 "경상도에 살다가 전라도나 강원도로 이사가는 경우도 완전 적응하는데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물며 체제가 다른 곳에서 살다왔으니 적응이 힘든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실제 최기영씨와 박철민씨 인터뷰 후 기사 작성을 위한 논의 과정에서 거주 5년 차에 접어드는 박씨와 거주 1년 남짓을 넘긴 최씨의 사회 적응도에는 분명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연령과 직업의 차이를 감안해야겠지만 '거주 연차'에서 오는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 살아오던 것과 판이하게 다른 사회 속에서 안정감을 찾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낙관론을 펴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장에 '우리와 다른 말투'를 쓰는 '그들'을 판단하려는 들거나 섣부른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다. 단단한 땅을 뚫고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들, 그 부단한 노력을 댓바람으로 날려버리지 말았으면 한다.

북한이주민, 그들이 본 '북한응원단'

▲ 8월 27일자 매일신문 - 미스터 팔공
지난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 기간 북측 응원단이 있었던 경기장에 경기를 보러 갔었다는 박철민씨는 "별다른 감상에 젖지 않았다. 평소에 북에 대한 생각을 애써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인지 특별한 생각은 거의 없었다"고 짧게 답했다.

또한 유대회 중 보수 단체들의 기자 회견에서 발생한 북측 기자와의 물리적 충돌에 대해서 박씨는 "서로 입장 차이가 있으면 다툴 수도 있고 그런 것 아닌가.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북한여자축구경기를 보러 갔었다는 최기영씨는 "북한응원단도 인상적이었지만 더 열심히 응원하는 대구 응원단을 보면서 '진짜 하나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북에 대한 그리움은 없지만 그래도 북측이 이기는 모습을 보니 반가웠다"고 당시 심정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기자 회견장의 충돌이나 응원단의 현수막 수거 사건에 대해서는 '다소 가식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북측으로 돌아갔을 때 당의 반응을 의식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는 최씨는 "무엇보다 남과 북의 차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깝고 답답했다"고 말했다. / 위정은/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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