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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윤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란 문구가 적힌 명함. 명함의 주인공은 현대자동차 영업사원인 이생기(46)씨다. 그의 활동 무대는 전국구. 차를 산다는 사람만 있으면, 또는 아는 사람만 있으면 전국 어디라도 안가는 데가 없는 전국구 영업사원이다.

“열심히 사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항상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죠. 경험 해 볼 건 다 해보고 죽을 고비도 넘겨보니 내 인생에 자신이 있네요.”

그가 영업을 시작한 것은 26살 때부터. 1980년대 초반, 대전충남을 통 털어 영업사원이 20여명, 대리점이 1개이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반 봉급생활로 가정을 꾸리기가 어려웠어요. 힘은 들지만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집념과 오기하나로 차의 '차'자도 모르고 시작했습니다.”

첫 입사 후 5개월이 지나자 판매 부진을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5개월을 일했는데 성과가 없는 그를 보고 적성에 맞지 않는 게 아니냐는 상사에게 “3개월만 기회를 달라”고 통사정했다.

그가 권고사직을 당하던 때가 12월. 한 겨울, 두꺼운 외투 하나 없었던 그는 외투를 빌려 입고 권고사직을 당한 그 시점부터 하루에 1,000장씩 스태프를 찍어서 아파트를 돌기 시작했다.

“3개월 동안 토, 일요일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돌렸어요. 1,000장씩 스태프를 찍는 시간이 2시간 이상이었고 10시에 전단지를 들고 나와서 아파트를 돌면 새벽 1~2시가 훌쩍 넘었죠. 그때 저는 단벌 신사였는데 옷을 세탁할 시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미신 때문에 12월부터 2월까지는 차를 사지 않았다. 그의 눈물겨운 노력은 드디어 3월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3개월 단위로 판매왕을 뽑았는데 이씨는 그해에 무려 3번이나 판매왕을 했다. 이씨가 실행했던 ‘새벽, 야간 작전’은 지금도 영업의 진리로 남아있다.

“영업을 하면서 제일 싸고, 빨리 나오는 짜장, 짬뽕을 하도 많이 먹어서 지금도 먹기가 싫어요. 영업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문전박대는 서러움도 아니에요. 인격무시를 당하는 게 가장 큰 서러움이죠.”

그는 인생 역경이 참 많은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 먹고 하나 팔며 아이스크림 장사를 해서 노트 1~2권 살 정도의 돈을 벌 정도로 일찍이 사회경험을 했다. 6형제 중 다섯째인 그는 부모님이 학비대기도 빠듯한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 시절에는 신문배달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 때 학비를 제때 내지 못하는 저를 보고 선생님께서 넌 학비도 못 낼 애니까 상고에 가라며 원서를 써줬어요. 자존심이 상했고 하늘이 무너졌죠. 고등학교에서 주산 부기를 배워야 하는데 돈이 없어서 독학 반, 학원 반 다니다가 학원 강사로 나섰어요. 그렇게 고교를 졸업했고 어렵게 대학을 마쳤습니다.”

그는 지금도 이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 기분이 착잡하단다. 형제도, 부모도 모르는 사연이 많을 정도. 형제가 많다보니까 사는 방법을 개척한 것은 스스로의 몫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그가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씨가 말하는 가정에서의 행복 만들기 비법을 전수해줬다.

“저는 아내와 싸우고서도 항상 집니다. 빨리 져야지 행복해지죠. 손을 잡고 아무 말 없이 걷기도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가족의 손은 하루에 3번 이상 꼭 잡아주자는 것이 결혼 전부터의 제 결심입니다. 지금도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실천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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