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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1980년 6월13일, '안보강화' '경제난 타개' 정치발전' '사회악일소'라는 사회개혁 4대 목표를 발표했다.

삼청교육대는 바로 이 사회개혁의 4번째 목표인 사회악일소라는 미명하에 인권을 유린할 근거를 마련했고, 이것을 근거로하여 이듬해 81년 1월까지 6만7백55명을 불량배라는 이름으로 검거했다.

이들에 대한 심사는 사회정화위원회(국보위내에 신설된 상임위원회)라는 심사위에서 결정됐다. 심사위는 잡혀온 사람들을 A, B, C, D 네개 등급으로 나눠 죄질을 형식적으로 분류했다.

심사 결과 A급 3252명, B,C급 3만9786명,D급 1만7717명이었다. A급은 군사재판에 회부됐으며 B급은 4주 교육후 6개월 노역, C급은 2주 교육후 훈방, D급은 훈방조치됐다.

심사과정에서 반론권은 없었으며 가족들과의 면회조차 금지됐다. 교육생뿐만 아니라 명령에 따라 삼청교육대로 차출된 요원들도 퇴근은 물론 전화, 외출,외박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순화교육이나 근로봉사기간중 군부대를 무단이탈할 경우 사살될 것을 각오해야 했다.

순화교육 중 가혹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88년12월 국방부는 삼청교육 수용자 중 50명이 교육 중 사망하고 397명이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공식발표했고, 그 후 삼청피해자가족 협의회에서 국회증언을 하는 과정에 사망자 4명이 추가확인되기도 했다.

신문에는 삼청(三淸)이란 말은 폭력, 공갈사기, 사회풍토 문란사범등 3개유형의 범죄자를 깨끗한 사람들로 만든다는 뜻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몸과 마음과 정신을 순화한다는 뜻으로 일컬어지는 말이라고 했지만 , 내 의사와 상관없이 그 중심에서 생활했던 입장으로 보았을 때 삼청이 생긴 이유는 국무총리 공관이 있는 삼청동에서 회의 끝에 탄생된 삼청5호작전에 근거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삼청5호 작전에 따라 각급부대는 무술 유단자들을 차출해서 교관 및 조교로 활용할 인원을 확보했으며, 교육장소는 신병교육대 주위에 망루를 세우고 기관총을 거치하고, 삼중철조망을 둘러 급조를 했다.

또한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삼청교육대 내에 특수교육대라는 것이 있어, 좀 더 가혹해야할 이유가 만들어 졌을 때 '공포의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었다.

그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고, 삼청교육대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것은 자료에 기초한 서술 뿐이다.

삼청교육대는 한 시대를 잠깐 달구고 사라진 역사에 묻혀버린 것일까. 위에 기술한 내용이 삼청교육을 설명할 전부인가. 그렇지는 않다.

가해자는 말이 없고, 피해자는 들어 주는 이 없는 절규를 한다. 제작년부터, 그곳에 대한 소설을 쓰다 중단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나온 소설은 상당히 많이 나왔지만, 가해자의 입장에서, 혹은 중립자의 입장에서 쓴 소설은 없다는 것을 알고, 진실에 좀 더 가까워지고 그것을 규명하고 싶어 준비를 했었다.

정말 그들은 죄인이었는지, 정말 그들 중에 죄인은 없었는지.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사람이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그 안에서 인간적인 냄새는 없었는지, 생과 사를 가르는 그곳을 치부의 기회로 삼다 파멸의 길을 간 사람은 없었는지. 인간의 모습에서 접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신기했다. 퇴근후 집에가서 티브이를 켜는 순간 재방송이었지만 세인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던 '삼청교육대'에 대한 특집이 나오는 것을 시청했기 때문이었다

가해자는 모자이크 처리됐고, 피해자는 눈물을 흘렸다. 새로운 사실, 그냥 묻혀버리고 말 진실이 많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진실을 말해야할 자리에서 오히려 왜곡시키는 것을 보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아직 진실은 저 땅속 깊이 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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