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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 어귀에 얕은 언덕이 있고, 언덕에는 커다란 원두막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 원두막을 별장이라 불렀고, 마땅히 모일 곳이 없는 또래들은 원두막을 아지트로 삼았다.

원두막은 볏짚으로 지붕과 벽을 만들고 출입문까지 달려 있는 매우 넓은, 말만 원두막이지 대처에 나갈 기회가 없는 아이들의 눈에는 별장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는 이층집이었다.

그곳에 모여 어느 어느 애들은 멋있게 어른 닮은 담배연기를 내뿜기도 했고, 누구의 손을 거쳐 들어왔는지 모를 펜트하우스 표지를 닮은 영화 포스터의 여배우를 보며 동네 누구는 내가 찍었다는 결의를 공표하기도 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어느 형이 누구네 누나랑 도장을 찍었고, 어느 여선생은 어느 선생이 잡아 먹었다더라는 등의 '카더라 통신'을 어른처럼 전달하고 어른처럼 새겨듣고 어른처럼 제스처를 쓰면서 야릇한 질투에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다.

서울로 간 누구네 형은 윤이 반질바질 나는 구두를 사신고 왔다거나, 누구네 누이는 누구랑 붙어서 애를 배었다는 등의 증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하는데 열을 내며, 조금씩 성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가는 사춘기를 보내는데 원두막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해 겨울, 정월 보름 날은 아주 밝았다. 짚으로 새끼 줄을 꼬는 친구네 사랑방에 모여 고구마도 삶아 먹고, 동치미도 꺼내 먹고, 정보를 교환하고, 유언비어를 만들고 추리하고 규정짓는 놀이에 싫증이 날 즈음, 누군가가 가슴떨리는 제의를 했다.

"별장에 불을 지르자."

악동들이었지만, 불을 지르자는 제의에는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말은 이미 나왔고, 나온 말은 종반으로 접어든 겨울방학을 마무리할 수있는 엄청난 스릴로 다가왔다. 무료한 몸뚱아리들에 하나 둘 피가 돌기 시작하며 모공이 열리기 시작했다. 역모가 누설되면 삼족을 멸문하는 서슬 퍼런 시대로 갑자기 순간 이동된 우리들은 모반을 꾀하는 심정으로 아주 은밀하게 실행에 옮길 계획에 들어갔다.

첫째, 오늘 중으로 태워야 한다. 둘째 여름 서리하다 걸렸을 때 우리를 고문한 악덕 영감이므로 원두막을 태워야 할 명분은 이미 충족돼 있다. 셋째, 구경꾼을 만들어서 배신자가 나오면 안된다. 전부 다 같이 불을 질러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 넷째, 기밀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싫어도 참여해야 한다.

아이들은 각자 짚을 말아쥐고 성화를 채화하듯이 선배가 하사할 불의 분배를 기다렸다. 하나,둘, 셋,넷... 각자의 손에 들린 짚단에 불이 붙었을 때. 역할분담에 따라 누구는 기둥에, 누구는 지붕에 누구는 벽에, 누구는 사다리에... 등으로 불을 옮겨 붙였다.

겨울 가뭄에 말라있던 짚으로 엮은 이층 원두막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하늘로 치솟는 불기둥은 보름달빛보다 도 더 밝게 온 동네를 붉게 물들였다.

막상 불을 지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큰 불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을 쪽에서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은 잠시 불길에 어른거리는가 싶더니 허둥대며 도망갔다.

엄청난 일을 저지른 후회스러움에 밤새 자는 척만 하고 뜬 눈으로 새운 다음날 아침에 불러 세운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어떤 못된 놈들이 황씨네 원두막에다 불을 질렀다는구나. 천하에 잡 놈들 같으니... 너 어제 밤에 어디서 놀다 왔어? 혹시 니가 한 거 아니여?"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지만, 정색을 하고 대들었다.

"아고 엄니는 자식을 멀로 보는 거여. 내가 그렇게 못된 놈으로 보인다는 거여 머여."

스스로 표정관리하며 둘러대는 가증스러움에 놀랬지만 그렇다라고 말할 엄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놈 쳐다보는 것 좀 보게. 맞어, 내새끼는 절대로 그런 못된 놈이 아니지. 암, 얼매나 착한 내새낀디."

예상보다 불을 논 후유증은 심각했다. 마을 청년들을 중심으로 탐문에 들어 간 것은 물론, 이웃 마을까지 뒤지고 다녔으며, 어느 놈들인지 걸리기만 하면 감옥에 보낸다는 말까지 돌아 지옥같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아이들은 이미 등교를 했고, 원두막을 태운 범인을 잡는 움직임도 시들해졌다. 불을 논 못된 놈들을 잡아서 응징을 하려는 움직임도 분노가 가라 앉으면서 심증은 가지만 밝혀서 득될 게 없는 어느 집 아들, 누구 동생 등등으로 얽히고 설킨 일이라 시간에 묻혀 버렸다.

누군가 입만 벌리지 않으면 완전범죄는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가슴에 묵직한 돌로 남은 껄쩍지근함은 한번도 속여 본 적이 없는 나를 믿는 어머니께 숨겨야할 비밀을 만든 것은 성공하곤 상관없는 풀어야할 숙제였다. 어머니는 나를 믿는데, 자식은 어머니를 속이다니.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새끼가 방화범은 아닐 것이라는 어머니의 믿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그 말이 아버지를 통하여 마을에 윤곽을 드러내면 감당해야할 고초와 배신자로 낙인찍힐 비겁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언젠가는 말해야지.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어머니에게 말해서 용서를 빌겠다는 마음으로 정리를 하고 불지른 것에 대한 죄의식을 미정으로 남겨 놓았다.

그 해 봄 진달래가 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마을 어귀 언덕의 원두막은 타다만 잔해로 아직 시커면 뼈로 딩굴고 있었지만, 그길은 외면하고 지나가면 보이지 않아 견딜만 했다.

어느 날, 몇일만 기다리면 온 들판을 진달래로 덮을 봄의 잔치가 기다릴 때, 어머니는 서른일곱 살 나이로 돌아 가셨다. 말해야지 말해야지 말해서 비밀을 털어버려야지. 겨우 삼개월을 가슴앓이 했을 뿐인데 어머니는 비밀을 들어 줄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그냥 가버리셨다.

말을 하고 싶을 때 말할 기회가 없다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될 비밀 같지 않은 비밀을 영원히 혼자 지켜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자리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지금 원두막이 있던 자리에는 누가 주인인지도 모르는 이층 양옥집이 들어서 있고, 궂은 날이면 뻘처럼 진 흙탕물을 피해 달구지가 지나 간 길로 돌아 다니던 길은 아스팔트로 반듯하게 포장된 도로로 변해 있다.

가끔 고향에 가는 길에 그 언덕을 보노라면 말했으면 좋았을 비밀이 생각나 답답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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