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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왠지 괌(Guam)은 나에게 대단한 낭만으로 와 닿았었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인 어릴 때 그림에서 본 야자수 해변가의 기억, 그 후에도 괌은 영화 ‘남태평양’에서 본 그런 곳일 거라는 상상 등이 합쳐 그랬던 것 같다.

그 환상은 약 13년 전 그 섬에 가보고 산산이 깨졌다. 한 나라, 한 도시가 아름다우려면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도 아름다워야 한다. 내가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3일 후 떠나올 때까지 거기에서 겪은 경험은 그게 아니었다. 괌은 낭만이 아니라 지옥 같다는 생각뿐이다.

1997년 대한항공 소속 점보 여객기가 괌의 알라딘 공항을 착륙하다가 추락, 229명 (대부분 한국인)이 사망한 사건을 나는 지금도 우연으로 보지 않는다. 괌 공항의 빈약한 시설과 거기 직원들의 일방적이고 평소 무책임한 태도가 일조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약 두 달 전 가수 김현정씨가 괌에 입국하려다가 이민국 직원들에게 당한 수모가 사실이라면 내 판단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음을 증명해준 것이었다.

앞으로도 다른 한인들이 거기에 갔다가 재수가 없거나 마땅히 할 소리를 하다가 당할 수 있는 리스크이며 그대로 넘어 가버릴 일이 아니었다. 김현정이 관련된 괌 공항 사건을 모르는 한국인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시드니에 사는 교포다. 여기에서 한국에서 오는 매체를 읽고 안대로라면 그는 KBS 2tv '산장 미팅' 찰영 차 괌 공항 입국 수속 중 이민국 직원에게 강제로 끌려 구금 당하고, 양말까지 벗간채 몸 수색을 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 사건보다 더 의미가 심각하다고 본다. 장갑차 사건은 어쨌든 사고였다. 김현정 사건은 사람이 죽지는 않았지만 강간에 비할 수 있는 큰 인권 침해였다. 그는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으며, 있다면 대부분 다른 한인 입국객처럼 고분고분 하지를 않아 ‘괘씸죄’에 걸린 것 같다.

이미 시간이 지난 사건을 이제서야 거론하게 되는 이유는 그간 한국 언론이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지켜보느라 기다렸기 때문이다. 괌 정부는 초기에 김씨에게 간접적으로 사과를 했으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인권 침해 구제 방안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나의 일차적 관심이 아니다.

과거 나의 괌 경험으로 봐 내 생각으로는,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한국 언론이 사건의 전모를 더 소상히 알리는 심층 보도를 통하여 그 쪽으로 갈 관광객들에 대하여 계몽하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관광객이 줄 것을 우려하는 괌 부정부와 관광청이 어떤 새로운 조치를 취하는 등 좀더 성의 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말로 끝나고 말 수 있는 사과를 받는 것보다도 더 실효성이 있는 대응 방법이 된다.

그런데 내가 아는 한, 그간 한국의 큰 언론들은 이 사건을 작은 사건 기사로 다뤘을 뿐 그런 교육적인 보도를 대대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괌 방문 한국인들과 관련, 비슷한 사건은 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나는 13년 전 겪은 좋지 않은 괌 여행 경험에 비추어 김현정씨 사건을 해석해봤고 이와 관련 언론이 어떤 보도를 해야 할까를 말한 것이다. 그때 일어난 일을 아래에 쓴다면 내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 지 명확해질 것이다.

난폭한 운전 기사

1991년 12월, 어느 추운 날 밤 나와 우리 가족은 괌을 거쳐 호주로 오는 미국적 비행기(남태평양 도서 간 노선이 전문인 항공사로 한 때 한국에 취항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중단했다)를 타기 위하여 김포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시간 얼마 전부터 불길한 소문이 나돌더니 곧 항공사 직원이 나와 발표를 했다. 고장 때문에 다음 날 아침에야 비행기가 들어와 가게 된다는 것이다.

공항은 잠시 아수라장이 됐다. 승객과 출영객 등 4백 여 명이 한국인 직원을 향하여 삿대질을 하면서 거세게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그 날 밤을 우리는 시내 호텔에서 피난민처럼 보내고 컴컴한 새벽 공항으로 실려갔다. 호텔에서의 푸대접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 큰 악재는 괌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전원 한국인인 승객들은 대부분 처음 해외에 나오는 단체 관광객들이었다. 공항 대합실로 몰려 나오는 이들을 향하여 공항 직원들이 손을 들어 이리저리 가라고 지시하는 폼이 꼭 훈련소 교관이 신병 다루는 것 같았다. 영어로 소를 한 쪽으로 몰거나 여러 죄인들을 잡아갈 때 쓰는 동사로 'round(ed) up'이 있는 데 바로 이런 장면을 말하는 것이다.

나와 우리 가족은 관광이 아니라 괌 경유, 호주로 가는 환승객이었으므로, (1) 다음 비행기 연결이 어떻게 되는가, (2) 공항 출국을 하게 되는가 혹은 대합실에서 기다리게 되는가, (3) 밖으로 출국하는 경우 짐을 힘겹게 들고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맡길 수 있는가 등 알아야 할 게 많은데, 안내가 전혀 없다. 무조건 나가라고 밀어 부치는 말단 직원들에게 말을 걸어 봐도 대꾸가 없다.

공항 밖으로 나와도 안내는 없고, 하청업자인 마이크로 버스 운전기 선에서 모든 일이 처리되는데, 바로 연결되는 비행기는 없고 괌에서 2∼3일간 묵게 된다는 떠도는 소식뿐이었다. 그리고 버스에 그룹으로 나뉘어 실려가는데 갑자기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운전 기사에게 다른 일로 뭐라고 말을 걸었더니 그 반응이 보통 난폭한 게 아니다. 원주민 피가 섞인 듯, 일부 검은 색깔에 험악한 얼굴인 이 사람에게 길게 대항하다가는 살아서 못 돌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더 참담했던 것은 괌에 내린 같은 한국인 승객들의 무심한 태도였다. 김포 공항에서 난장을 부리던 사람들은 어디로 간데 없고 모두 시골 닭처럼 조용하다. 그룹을 인솔하는 가이드들은 다른 사람이 어떤 대접을 받든 말든 자기 손님 챙기기 외에 관심 없다. 버스 안에서 내가 운전기사와 시비가 붙어 고역을 당하고 있지만 모두 가만히 앉아 있다.

괌 공항은 어느 시골 역처럼 초라했고, 주변 도시의 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도 내가 말로만 듣고 환상적으로 그렸던 괌에 도착해서 놀란 것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 괌은 미국 영토이다. 하지만 본토에서 떨어져 있는 광산촌 같아 외지에서 흘러 들어와 관리를 하는 백인들은 막무간이고, 식민지 생활에 찌들은 원주민은 노예 근성에 젖어 이렇게 된 게 아닌가 생각해봤다. 미국은 2차대전 때와 그 후 냉전체제를 거치면서 이 태평양 섬에 엄청나게 큰 앤더슨 공군 기지를 건설했지만, 민항이나 사회간접 시설 투자는 안하고 버려둔 것이 틀림없다.

헤프닝으로 끝낼 일인가?

그 후 6년이 지난 여름, 대한항공 여객기가 이 민간 비행장에 착륙하려다 대형 참사를 낸 이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항착륙 유도 장치가 작동 안하고 있었다던가, 그런 장치를 관리하는 인원들이 매우 무책임했다는 한국 쪽 주장들은 위에 말한 내 경험과 인상으로 봐 설득력이 있다.

'사고는 일어난다(Accidents will happen)'라는 영어 속담이 있지만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을 줄이면 사고는 준다. 나는 한때 한국 공군에서 근무하면서 들은 풍월로 비행기에 대한 상식이 조금은 있다. 괌 민간 공항처럼 낙후된 공항에 점보를 운행해서는 안될 것이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승객이 폭주하는 바캉스 계절을 대한항공은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하여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가?

이번 김현정 사건만 해도 그렇다. 한국의 언론들 이 사건을 인기 가수가 이런 일을 당했단다하는 가십 정도로 다뤘을 뿐이다. '휴지통'이나 '연예게 정보'와 같은 하찮은 난에 다른 것부터가 그렇다. 이런 일이 괌으로 달려가는 다른 많은 동포 관광객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 안 하는가. 김현정씨가 아닌 무명인이라면 이 정도의 기사화마저 안되고 넘어갔을 것 같다.

나는 괌에서 겪은 경험을 그때 여기 교포 신문에 꽤나 자세히 썼다. 그러나 그 기사가 한국에 전해졌을 리가 없다. 설령 내가 그런 기사를 한국의 주요 신문에 보냈어도 실렸을 것 같지 않다. 이게 한국 언론의 속성이다.

만약에 그간 괌 여행 실태를 정확히 알리는 심층보도가 이따금 있어 공론화되고 그 결과 괌 정부나 미 연방 이민국 직원들도 신경을 써왔더라면 김현정 사건은 안 일어나고, 또 한국 관광객도 이 외딴 섬에 떼를 지어 몰려가면서도 조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고적 보도는 전혀 없고, 신문과 텔레비전에는 '아름다운 괌'에 어서 오라고 손짓 하는 괌 관광청과 여행사 광고와 '여가 및 여행' 난 기사 일색이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긴 것 아니겠는가.

한국의 텔레비전들은 삼풍사고 때와 같이, 니미츠힐(니미츠는 괌 공항 문턱에 있는 야산 이름) 공항 참사 현장을 몇 일을 두고 우려 먹었다. 그 후 한국의 한 케이블 텔레비전은 '아시아 리포트 특별 기획- KAL기 괌에 추락, 유가족 120시간의 비망록' 이란 프로를 만들어 사고 직후부터 유족들이 사고현장 답사를 마치기까지 총1백 20시간에 걸친 유가족과 함께 목격한 참사의 현장을 방영했었다.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처참한 광경을 자세히 담은 다큐멘터리는 분명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보도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비용으로 일찍 괌 관광의 모순을 찍어 끔찍한 사고를 막는 데 도왔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허튼 소리가 될까.

이번만이라도 언론의 심층보도로 관광행정 공무원, 관광산업 종사원, 해외 주재 외교관들이 한국은 관광객을 얼마나 많이 내보는가 자랑만 하지 말고 귀한 외화 가지고 나가는 동포 관광객들이 재대로 대접을 받는가, 국가 품위는 어떤가 등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는데, 과거처럼 그대로 넘어가고 있다.

언론사의 생각이 여기까지 못 미친 탓인지, 아니면 관광객이 줄어들면 난리를 칠 여행사와 광고주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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