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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양에 빛나는 누드 발레
ⓒ 제리 아비나임 제공
누드가 세간의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

연예인들이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을 신호탄으로 누드는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생활의 한 영역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누드 크루즈(Cruise)'와 '누드 캠핑'에 이어 '누드 비행'이 화제에 오르더니 급기야 IT 상품들도 같이 옷을 벗는다. 투명한 소재로 만든 가전제품과 투명 은색 디자인의 워크맨이 출시되고 부속이 들여다 보이는 컴퓨터가 나온다. 투명한 싱크대에 서서 옷을 벗고 '누드 쿠킹'을 한다니 과연 이러한 누드 열풍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전세계 누드 리조트의 매출이 또한 날로 증가세에 있다.

최근에 나온 김완선 누드는 제목 '몸으로 쓰는 그녀의 시'에서 보여주듯 스토리가 가미 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고 이혜영은 예비 남편과 함께 '커플 누드'와 '강간 누드'를 찍는다니 그 발상이 섬뜩하다. 트렌스젠더 하리수도 벗었고 성현아도 나선 가운데 미스 누드 선발대회의 성인 동영상도 모바일 서비스에서 공급되고 있다. 여체를 상업화하는 하는 세태도 문제지만 돈이 되면 벗어 던지는 일부 연예인의 상업적 속성과 컴퓨터 앞에서 여체를 찾아 나서는 남정네들의 극성이 부채질한 결과다.

김완선을 동양적인 몸매라 평가하고 이혜영을 이국적 분위기라 띄우는 가운데 바야흐로 누드 열풍은 점입가경(漸入佳境)의 길로 들어섰다. 다만 조세현 사진작가가 고소영의 세미누드 영상집을 내면서 기존의 누드와 차별화를 선언한 대목은 다소 신선하게 느껴진다.

최근 미국의 플로리다 해변 누드촌에서는 테니스 선수 20명이 2시간동안 나체로 게임을 하며 살아 있는 동영상을 제공했다니 듣기만 하여도 시원한 모습이 그려진다. 돈을 좇는 상업적 발상이 연예인들의 벗기를 유발했다면 천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가려는 인간의 회귀 본능이 누드촌을 형성하는 근간(根幹)을 이룬다고 하겠다.

인간은 왜 옷을 벗는가.

이는 곧 기계 문명에 예속된 현대사회에 대한 극단적 반항의 표출이자 원초적 생활로 돌아가려는 자연인이 희구하는 자유 의지의 실현이다. 우리의 몸은 태초에 벗겨져 있었으나 수치심의 발동으로 신체를 가리기 시작했으며 차츰 자연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걸친 것이 의상의 시초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몸 자체를 드러내는 행위가 기후 환경이 허락하는 한 다같이 벗는다는 전제에서는 커다란 이슈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나체론자의 철학은 설득력을 지닌다. 누드촌은 현실적으로 지중해나 플로리다와 같은 온화한 기후권의 해변에서 형성되기 마련이다. 누드 취침이 주는 안락감이 정신 건강에 좋다는 보고서도 있었다.

주관적 양심과 신념에 의해 옷을 벗는 이 같은 나체 운동과 상업적 행태에 기인해 옷을 벗는 사회 풍조는 분명 구별지어 논할 대상이다. 벗은 몸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 선정적인 면만 들추어 보는 편협한 색정적(色情的) 시각을 자제하고 곡선이 주는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정신적 심미안(審美眼)을 높여야 한다.

근원을 따지자면 현대의 오염된 시야는 성매매에서 비롯된 여체의 상품화가 부른 잘못된 개념에서 출발했다. 이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항명(抗命)이자 모독인 것이며 순수한 예술성과 자연의 섭리를 무너뜨리는 휴머니즘의 파괴에 다름 아니다.

누드는 그 행위가 예술적 정신을 수반할 때 비로소 값어치를 인정 받는다. 누드가 아름다운 이유는 인간의 몸이 영혼을 담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몸이 만드는 선의 굴곡이 조형적인 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김흥수 화백은 이를 두고 “구상 화면에서는 표피(表皮)적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추상 화면에서는 상상과 무의식의 세계를 그려 욕망과 갈등을 형상화 한다”고 누드 작업론을 폈다.

그러므로 모델에서 풍기는 내면의 사고가 그림에 그대로 배어나와 그 가치를 높이는 요체(要諦)를 담당할진데 지금 머리를 싸매고 덤비는 저들의 누드에는 오직 들끓는 한탕주의와 황폐한 선정성(煽情性)만 횡행(橫行)하고 있으니 참으로 잘못 가고 있는 누드 풍토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술적 관능미의 탈을 쓴 이러한 누드 행진은 갈수록 연예인 전체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결국은 식상한 도색한(桃色漢)들에게 버림받아 그 내면에 숨겨진 상업성마저 퇴색되어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누드가 인간의 내면에 깔린 정서를 표출할 때 비로소 예술에 다가서는 새로운 틈새 시장을 개척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순수한 누드의 예술적 영역을 지켜 나가기 위해 성숙한 시각을 동원해 외설로부터 철저히 구별하여 독립시키는 역할은 우리 대중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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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하 기자는 미조리 주립대애서 신문방송학을 수학하고 뉴욕의 <미주 매일 신문>과 하와이의 <한국일보>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시사 주간신문의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로스엔젤레스의 부동산 분양 개발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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