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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 앞에서 인사를 나누는 머리 하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잘 깨어나서 오세요!" "그래, 갔다 올게." 두 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린다.

지난 주, 81세이신 친정 아버지께서 '척추간협착증' 수술을 받으셨다. 두 시간 걸린다던 수술이 세 시간 반을 넘기자 보호자 대기실의 어머니 입술은 바싹 타들어 갔다. 비록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아버지는 다행히 수술을 잘 마치고 입원실로 옮기실 수 있었다.

자식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버지가 어머니께 하셨다는 말씀.
"내가 죽었다 살아난 것 같아. 이제 우리 한 날 한 시에 죽자."
평생 두 분이 떨어져 있으면 큰 일 날 것 같이 여기면서 금슬 좋게 사신 분들답게 느껴졌다.

나는 가끔 "엄마, 엄마 갑돌이가 그 새를 못 참아 갑순이 찾으세요…" 하면서 장난 삼아 아버지, 어머니를 갑돌이, 갑순이로 부르며 놀리곤 한다. '여자로 태어나 남편 사랑에 있어서는 부러울 것 없다'시던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난 가족〉의 예순 살 시어머니는, 15년 동안 섹스를 하지 못했고 그나마 평생 오르가즘을 한 번도 못 느껴봤다고 하면서, 뒤늦게 만난 초등학교 동창과의 섹스에서 맛보는 삶의 새로운 기쁨을 이야기한다.

평생 전쟁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간암에 걸린 남편. 복수가 차 배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남편 옆에서도 울고불고 하지 않던 시어머니는, 남편이 세상 떠난 후 아들, 며느리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이야기한다. '세상 솔직하게 살 일'이라면서.

시사회장에서 같이 영화를 본 누군가는 시어머니의 초등학교 동창인 새 애인이 너무 드러나지 않았고 매력이 없다고 말했지만, '육체의 욕망과 감정에 솔직한 게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시어머니에게는 다른 사람도 인정할 수 있는 눈에 띄는 매력보다는 서로의 소통과 교감이 더 중요했을 법하다.

영화 속 시어머니 병한의 모습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새로 알게 된 인생의 맛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후의 자기 길을 선택해 나아간다는 점이다. 사별한 남편과의 의리라든가, 아들, 며느리 눈치라는 것은 애초부터 상관없는 일로 규정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끈에 얽매이고 사슬에 묶여 살아가는가. 영화는 개인에 집중하면서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새로 찾은 사랑과 함께 외국으로 떠나는 병한의 모습에는 젊은 사람도 실천하기 어려운 자기 선택과 자기 책임을 스스럼없이 결단하는 시원함이 있다.

노인복지 현장에서 만나는 어르신들, 특히 여자분들은 처음에는 쉽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지 않으시지만 같이 하는 시간이 쌓이고 오래 마음을 나누다 보면 속 깊은 이야기를 쏟아 내곤 하신다.

〈바람난 가족〉의 시어머니 병한처럼 평생 오르가즘이라곤 모르고 살았다는 어머님들의 사연은 정말 끝없이 이어지곤 한다. 청상의 시어머니가 밤이고 새벽이고 부부가 자는 방 앞 쪽마루에 앉아 담뱃대를 터시는 소리에 늘 불안했다는 분, 밤늦게 혹은 새벽녘에 아무 소리 없이 시어머니가 아들 며느리 사이에 끼어 들어 누우시는 바람에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이가 들어섰다는 분….

그래도 대부분의 어머님들은 그러려니, 여자의 한 평생 삶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려니 하고 살아 오셨다고 한다. 병한은 이런 여성 노인의 삶에 아주 다르게 그리고 아주 새롭게 도전해 온다.

아들과 며느리 부부의 바람에다가 '시어머니까지도' 바람난, 별나고 이상한 가족 이야기로만 보기에는 영화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화면 밖으로 차고 넘친다. 그래서 오르가즘이라곤 모르고 살아오신 어머님들이 이 영화를 보신다면 뭐라 말씀하실 지 궁금하다.

어르신들의 영화관 입장료도 할인해 드리는 시대가 왔는데, 좀 더 적극적으로 어르신들의 영화 관람을 권유하고 여성 노인분들의 성(性)에 대해서도 마음을 터놓고 한 번 이야기해보는 자리를 마련하면 어떨까.

노인 영화라고 할 수는 없고, 또 시어머니가 나오는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그리 많지는 않지만 차지하는 비중은 만만치 않으므로 충분히 이야기를 시작하는 계기로 삼을 만하다.

앞으로 조금 더 충분한 분량과 풍부한 내용으로 여성 노인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들 삶의 지평이 좀 더 넓어질 것이다. 그분들의 삶은 곧 내가 걸어갈 길이며, 지금 우리의 삶을 비쳐보는 거울이다.

영화 속 바람난 할머니는 이 시대 노년의 삶에 많은 질문을 던지며 이 땅이 아니라 다른 곳을 향해 비행기를 타고 떠났고, 우리는 떠나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떠나지 못한 수많은 할머니들과 여기에 남아 오늘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난 가족, 2003 / 감독 임상수 / 출연 문소리, 황정민, 윤여정, 김인문, 봉태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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