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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일보 8월 27일치 가판 1면.
ⓒ 동아일보 인터넷판
26일 저녁 사무실 책상 위로 다음날치 아침 가판신문이 배달됐다. 여러 신문들을 훑어보다 한 신문의 기사에 눈길이 멈춰섰다.

'월마트 한국투자 재검토'.

<동아일보> 27일치 1면 톱기사의 제목이다. 중간 제목으로 '경기침체-노사갈등-북핵 고려-타기업 영향 줄 듯'이 이어졌다.

기사의 요지는 지난해까지 한국에 7200억원을 투자했던 월마트가 경기침체와 노사갈등, 화물연대 파업 등으로 한국 투자계획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다는 것이다.(27일치 최종판에는 제목이 '월마트 한국 추가 투자 재검토'로 바뀌었다.)

1면 기사만으로 모자랐던지 도표 등이 그려진 풍부한 해설 박스기사가 3면에 이어졌다. 제목은 "'기업하기 힘든 나라' 외국인 발 빼나"였다.

하지만 이 박스기사 옆으로 큼지막한 사진이 실렸다. 사진 속에는 일주일째 파업을 진행 중인 화물연대 조합원 4명이 빨간 두건과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민주노총 건물 입구 경비를 서고 있는 장면이다. 신문의 의도가 그대로 녹아 있는 편집이었다.

또 다시 '파업'이라는 딱지에 '빨간색'이 칠해졌다. 적어도 아침에 이 신문만을 본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노조의 전투적인 노동운동 때문에 훌륭한(?) 외국의 다국적 기업이 투자 의욕을 잃고 한국을 떠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 27일치 동아일보 가판 3면. 화물연대 조합원 사진과 박스기사 제목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 동아일보
여전한 보수언론의 '노동'에 대한 색깔 칠하기

전형적인 보수언론의 이같은 노동에 대한 덧칠은 이번뿐 아니다. 지난 6월 조흥은행 노조의 매각반대 파업을 포함해 철도노조와 두산중공업 노조 파업 등 헌법상에 보장된 기본권인 노동자의 파업권이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미 광고라는 자본의 힘에 의해 신문 지면이 좌지우지 되는 수구언론들의 이같은 행태를 또 다시 들먹이는 자체가 오히려 식상할지 모른다. 문제는 이들 언론종사자들이 '반 노동적' 편집 방향에 따라 일반적인 '사실' 자체가 위험하게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는 점이다.

월마트의 예를 보자. 월마트의 이번 투자 재검토에 화물연대 파업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까? 이번 파업 조합원의 대부분이 컨테이너와 시멘트수송에 관련돼 있는 점을 볼 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할인점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물품을 운반하는 데 차질을 빚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형 할인점들은 별도의 수송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역시 투자 재검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월마트는 또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따라서 미국 본사를 비롯해 전세계 월마트 지사에 노동조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001년 미국의 시민단체인 멀티내셔널 모니터는 필립모리스, 엔론 등과 함께 월마트를 최악의 10대 기업으로 꼽기도 했다.

중요한 점은 내부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 감소와 SK글로벌 사태, 사스 등 현재와 같은 국내외적인 경기 변동 속에서 월마트뿐 아니라 대부분의 국내외 기업들이 투자를 다시 점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난 98년 외환위기를 틈타 한국 시장에 진출한 월마트는 거대한 자본과 마케팅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5년이 지난 올해까지 국내 할인점 시장에서 프랑스계 까르푸에 이어 5위에 처져 있다. 세계 1·2위 할인유통업체가 국내에서는 꼴지를 다투고 있는 것이다.

이미 업계 전문가들과 증권가 애널리스트 사이에서는 외국계 할인점들에게 올해가 중대 고비라는 의견이 많았다. 왜냐하면 점차 포화상태로 치닫는 할인점 시장에서 기존 토종업체를 상대로 이들 외국계가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월마트쪽에서 한국시장에서 철수하는 대신 투자를 좀더 신중히 가져가는 것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 1위, 월마트가 한국에서 부진한 이유

▲ 월마트 한국 실패가 노조 때문?
작년 매출액만을 보더라도 월마트는 토종업체로 시장 점유율 1위인 이마트의 16% 수준에 불과하다. 경상이익률에서도 이마트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예를 들어 1000원어치를 똑같이 팔았더라도, 이마트가 55원 정도의 이익을 남기는 반면 까르푸는 11원, 월마트는 3원 정도의 이익밖에 못 남긴 것이다.

왜 그럴까. 전문가들은 이들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내세운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 기준에 맞는 영업방식이 한국시장에서는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예를 들어 월마트의 경우 소비자에게 제품을 값싸게만 제공하기 위해 비용을 최소화하고 있다. 공장식 매장을 짓는 데도 땅값이 싼 곳에 잡다 보니, 다른 경쟁업체보다 지리적 여건이 불리하다. 당연히 소비자를 끌어모으기가 쉽지 않다. 매장 배열 방식도 서구식으로 진행하고 매장의 직원 수도 최소 인원으로 움직이다 보니, 할인점에서도 백화점과 같은 서비스를 바라는 한국 소비자들의 문화를 전혀 읽지 못했다는 평가다.

이같은 사례는 까르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까르푸는 지난 6월에 부산 사하점을 폐쇄, 땅과 점포를 일괄 매각하기도 했다. 다른 국내 토종할인점들이 앞다퉈 점포를 늘려나가는 데 반해 까르푸와 월마트는 기존 점포를 한국식 할인점 수준으로 리모델링하는 실정이다.

물론 국내에 들어와 있는 다른 외국 기업이나 자본이 월마트나 까르푸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들 업체들은 예외적일 수도 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대부분 외국 자본의 경우 제조나 유통업보다는 여전히 단기적 시세 차익을 목적으로 하는 금융자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일부 수구언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더 이상 강경 노조 때문에 선량한(?) 외국 기업들이 한국을 떠난다거나, 투자를 보류한다는 식의 여론에 현혹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외국자본이든, 국내 자본이든 이들은 노사문제를 포함해 모든 경제 여건을 철저히 따져 사업을 조정하든, 투자를 보류하든 결정을 하게 된다. 이것은 자본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한국 시장에서 월마트가 보여준 것은, 외국의 거대 자본이 가진 '글로벌 스탠더드'보다 '코리아 스탠더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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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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