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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생은 다른 곳에>
책 <생은 다른 곳에> ⓒ 북하우스
살다보면 자신이 속한 이 세계가 지긋지긋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일상에서 탈출을 꿈꾼다. '생은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의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 보기도 한다. 직업을 바꾸어 보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상에서 탈출하려는 시도 중에 가장 쉬우면서도 흔한 것이 바로 여행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했던 지긋지긋한 세계를 잊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이러한 꿈들을 실현하기 위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 본 사람이다. 여행의 목적은 짝사랑의 그 남자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리기. 그녀는 책의 서문에서 생활인으로 살아야 하는 운명과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성이 짊어진 일상의 견고함으로 인해 다른 생으로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과감히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을 시도한다. 그녀가 선택한 곳은 중국의 소수 민족 나시족이 살고 있는 려강(리지앙)이다. 그녀는 려강에서 지낼 한 철이 자신에게 모종의 안식을 주리라는 믿음으로 이곳을 향해 떠난다.

"리지앙 가는 길. 내게 리지앙 가는 길은 구름으로 기억된다. 해발 이천 미터에 걸쳐 있는 고속도로는 연신 구름 속을 넘나들었다. 창 아래 보이는 마을의 반쯤은 구름에 덮여 있었다. 머릿속에서 지도를 그려보았지만 라오스 옆, 티베트의 동쪽 어딘가가 선뜻 그려지지 않았다. 구름에 휩싸여 있는 내가, 지도 위 어디쯤 있는 것일까 생각하는 일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몽롱함을 내게 주었다."

그녀가 려강에서 한 일이란 그저 빈둥대며 놀다가 친구가 된 나시족의 장식품 가게를 봐 주는 일이다. 그녀는 다른 여행객들처럼 바쁘게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저 그 공간에 속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삶을 공유할 뿐이다. 나시족 가게 주인과 친구가 되어 가게를 봐 주는 일을 하고, 백족이라는 소수민족 마을에 놀러가서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하고 잠자리까지 얻는다.

자신이 머무르던 숙소의 주인이 한국어로 숙소를 소개하는 글을 써달라고 하자, 흔쾌히 써 준 숙소 소개에는 나시족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배어 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리지앙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다 가는 김보경이라고 합니다. 숙소 때문에 걱정이라면 주저말고 아량객잔으로 가세요. 백 년도 넘었다는 아니 세월을 알 수 없는 나시족의 전통가옥에서 상냥하고 친절한 나시 가족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녀의 여행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볼거리를 만나지 않더라도 가치 있는 이유는 아마 새로운 공간에 젖어 그 생활을 즐기기 때문일 것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어 새로운 문화에 젖어드는 것. 그녀의 여행은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속했던 세계를 잊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여행을 하기도 한다. 사소한 일들이지만 새로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발전시키고 새로운 시각을 얻는다면, 그 여행은 간단한 것일지라도 의미가 있다. 저자 또한 나시족의 상형문자인 동바 문자를 조각하는 것을 배우면서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얻는다.

"선생님과 여자친구는 내가 만든 풍경을 보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봄과 가을은 어디로 갔니?' '너무 복잡해서 그건 안 했어요. 지금 상태가 예쁘잖아요.'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돼.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잖아. 춘하추동은 함께 있어야 해. 동서남북도... 그건 산을 둘러싼 세상의 질서야.'"

작은 문자 조각 하나에도 우주의 질서를 생각하는 나시족 조각가의 말은 그녀에게 또 다른 지혜를 전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을 끝내고 귀국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상처와 아픔을 말끔히 씻고 일어나 있다.

"나는 터널 속에서 보낸 날들을 부끄러워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추억하지도 않는다. 생이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배춧국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방바닥에 붙어살았든 어쨌든 간에 그것도 내 생의 한 철이었다고 인정한다. 나는 터널 속에서 보낸 날들이 있었기에 어디에서든 '다만 고여 있음'으로 살아낼 수 있었다고 믿는다. 고여 있은 그곳이 바로 생(生)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나는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모든 한철을 나의 생으로 흡수할 것이다."

사는 게 지겨울 때, 힘들고 지칠 때에 이 책의 저자처럼 아무런 목적 없이 가벼운 여행길에 올라 보는 건 어떨지. 정 시간이 없고 장소가 적절하지 않다면 가까운 공원이나 강변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 공간이 나에게 새로운 모습과 의미로 다가온다면.

그 짧은 휴식을 통해 한 조각 여유로운 마음을 얻는다면 어떤 공간을 선택했든지 간에 그 여행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행을 통해 얻은 자유와 휴식을 일상으로 가지고 돌아와 자신의 삶을 좀더 풍요로운 의미로 물들게 한다면, 내 주변의 지긋지긋한 일들도 느긋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은 다른 곳에 - 려강기행

김보경 지음, 북하우스(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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