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몽빠르나스 서울광장에서 만난 지유남씨
몽빠르나스 서울광장에서 만난 지유남씨 ⓒ 박영신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외국계 벤처기업에서 일하다가 돌연 미국 유학을 떠난 지씨는 자신의 행보를 되돌아보며 단지 사회적 지위와 명성만을 좇아 온 이기적인 삶이었음을 자책하면서 "민족도 조국도 몰랐다"고 잘라 말했다. 그랬던 지씨가 자비를 들여 파리에서 자신과 남을 위해 '일'을 할 모양이다.

"한반도에서 전쟁만은 막자"

8월 15일 오후 5시(현지 시각) 파리에서는 다시 한번 요란하게 울려퍼질 징소리를 듣게 된다. 에펠탑으로부터 거대한 잔디광장 샹드마르스(Chanps de Mars)를 가로질러 마침내 평화의 벽까지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be the reds'를 고안한 박영철씨가 새롭게 디자인한 붉은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 인간띠를 연결한다고 한다. 과연 가능할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비롯, 3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반전반핵평화시민네트워크'가 추진하고 있는 '오 피스 코리아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이번 8·15 행사는 정파와 이념을 떠나 전세계에 한국인의 평화적 열망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평화의 벽에서 에펠탑까지, 파리에서 울려퍼진 ' 오 피스 코리아 '

오 피스 코리아 운동본부의 이승우 위원장은 메일을 통한 인터뷰에서 "민족해방을 맞이하는 8월 15일 파리에서 전 세계를 향해 한민족의 평화의지를 인식시키자"는 것이 이번 행사의 의의라면서 때문에 행사 당일 배포될 티셔츠는 붉은 바탕에 한반도의 화합과 평화를 상징하는 원이 그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남북문제와 관련하여 모든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는 이 운동은 특정 계층이나 이념을 탈피, 보편적인 평화 메시지 전달에 주력하면서 각종 정치적 성격의 행사와는 명확하게 구분될 것이라고 이 위원장은 덧붙였다. 북미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한마디로 "한반도에서 전쟁만은 막자"라는 것.

이번 8·15 행사는 모스크바, 뉴욕, 워싱턴에서도 파리와 동시에 개최될 전망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파리를 거점으로 베를린과 런던, 더블린에서도 일을 진행시켜 왔지만 재정과 인력의 한계에 부딪쳐 다소 미뤄진 상태다.

파리 교민들의 8·15 다짐…한 재미 한국 유학생의 무모함과 만나다

이보다 앞선 지난 6월 13일 파리 마들렌느 광장에서 조촐하게 열린 '효순이·미선이 1주기'를 마무리 하며 현장에 모였던 파리 교민들은 다가올 8·15 광복절을 기해 조국의 참된 해방과 전세계의 평화를 기원하는 대규모 행사 개최를 약속한 바 있다.

이어서 꾸준히 파리의 촛불집회에 참가해 온 원불교 파리교당의 김제영 교무와 교민 장동규(34)씨는 7월 15일 원불교 교당에서 만나 행사를 구체적으로 의논했으며 행사 제목을 '평화의 낮잠(가칭)'으로 결정했다.

교민, 유학생, 파리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 그리고 에펠탑을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여행자와 파리지앙들이 함께 에펠탑 뒷편으로 넓게 펼쳐진 샹드마르스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한국어, 영어, 불어 등으로 그려보이며 대규모 낮잠을 자보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나 파리에서 교민 대상의 집회가 열릴 때마다 지적돼 온 고질적인 문제, 즉 집회를 적극적으로 진행할만한 조직이 없다는 것이 이번에도 적잖은 장애가 됐다.

"파리에 사는 한인들은 미국이나 일본, 독일의 경우와 달리 프랑스인들의 성향을 닮아서인지 잘 모이려 하지 않는다"며 "모두가 한 사람만의 희생을 강요하는 듯 하다"고 그간 한인이 운영하는 민박과 식당을 위주로 홍보작업을 펼쳐온 장동규씨는 안타까워했다.

한쪽에서는 지난 6월 28일 파리에 도착한 지유남씨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파리의 민박집에 머물며 1주일 가량 정보수집을 시작으로 주말마다 한인교회를 위주로 홍보작업을 펼쳤지만 한인교회 목사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다소 힘이 빠졌다고 한다.

파리 유학생들을 만나보려고도 했지만 방학을 틈타 대다수가 파리를 떠난 상태였고 그나마 파리에 남아 있는 유학생들도 아르바이트에 여념이 없어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각다 못한 지씨는 배낭여행자들을 만나볼 요량으로 몇 군데 민박집을 둘러보기도 했다.

"역시 가장 힘든 일은 사람들을 만나서 취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지씨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매번 같은 내용의 설명을 되풀이하고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어라" 하기도 우스웠다고 한달여 경험을 토로했다.

"조국이 내게 뭘 해줬나?" VS "이거 돈되는 거야?"

지금껏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고 말하는 지씨는 첫째로 '무관심한 사람'을 꼽았다. "한반도, 조국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나", "전쟁이 나든 말든 외국에 있는데 여기까지 폭탄이 날아오나" 하는 퉁명스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이 때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죠. 하지만 폭탄이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날아갈 수는 있을 겁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고 한다.

둘째로 이번 행사를 이용해 '한몫' 잡겠다는 부류. "이거 돈되는 거야?"하고 생각없이 내뱉는 질문에 지씨는 '돈이랑 상관없다. 본인도 자원봉사를 하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해 봤지만 "얻는 것도 없이 그게 뭐야, 더워 죽겠는데…"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의도는 이해하지만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지씨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혼자서 가끔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고 한다. 생면부지의 파리에 무턱대고 찾아와 행사를 진행하겠다는 무모함이 만난 어쩌면 당연한 벽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광장 표지 아래에 선  지유남(사진 왼쪽), 장동규씨
서울광장 표지 아래에 선 지유남(사진 왼쪽), 장동규씨 ⓒ 박영신
이런 와중에 지난 7월 31일 알게된 것이 교민 장동규씨가 운영하고 있는 D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파리 관련 카페였다. 여기서 지씨는 마침 장씨의 8·15 행사 게시글을 접하게 됐던 것. 지씨의 연락을 받은 장씨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까닭에 이때부터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적극적으로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에펠탑은 세계적인 관광지이므로 늘 여행자들로 붐비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인에 연연하지 말고 현장에서 만나는 각국 여행자들과 함께 행사를 꾸미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합의한 두 사람은 구체적인 행사 내용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평화를 '수놓는' 사람들과 함께 다같이 평화를 '꿈꾸자'

먼저 집회가 시작되기 전 파리 원불교 소속 풍물패 '동남풍'이 에펠탑과 평화의 벽을 오가며 길놀이를 시작하면 현장에서 티셔츠가 배포되고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손에 손을 잡고 인간띠를 형성한다.

일정 정도의 사람들이 모이면 에펠탑과 평화의 벽 중간에 위치한 샹드마르스에 사람들은 '평화'라는 글자를 그리며 자리에 눕는다. 이때 잔디의 초록색과 티셔츠의 붉은 색은 보색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인상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제 낮잠이 시작되는 것이다. "평화를 수놓으며 잠을 자는 것은 젊은이들이 평화에 대한 꿈을 꾸는 행위와 일치한다"고 장씨는 설명한다.

적당히 잠을 잤다면 어디선가 조용한 음악이 들리고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씻어내는 씻김굿이 펼쳐져 잠들었던 사람들을 깨우고 참가자들의 자발적 행동으로 대동굿을 펼치며 행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경과가 어찌 됐건 행사는 눈앞에 다가왔고 마무리 작업만 남은 상태다. 한국을 출발한 200장의 티셔츠가 '프랑스내 판매 목적'을 의심하는 샤를르 드골 공항 세관에 묶여 있는 상태라며 14일에는 직접 찾으러 가야한다고 엄살을 떠는 지씨지만 그래도 장씨가 일찌감치 파리 경찰국에 접수한 집회신고서가 무리없이 통과됐다며 같은 날 14일 장씨와 함께 경찰국에 들러 허가서만 챙기면 된다고 한다.

경찰국의 허가서가 공항 세관 문제도 풀어줄 것이라고 의욕을 다지면서 단지 의욕 하나만으로 파리 땅을 밟았던 한달 전과 비교해 집회를 코앞에 둔 지금, 지씨는 그저 담담할 뿐이라고도 했다.

그래도 남는 아쉬움 '파리 한인회가 조금만 도와줬더라면…'

지씨와 헤어지고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습관처럼 메일함을 열어보았다. 물론 몇몇 지인들의 반가운 메일을 제외하고는 스팸메일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파리의 한 한인신문에서 보내온 안내문이 있어 주저없이 열어 본다.

8·15 경축기념행사

일시 : 8월15일(금) 10시
장소 : 재불한인회

1부 : 전통음악공연
2부 : 한인사회발전과 화합위한 간담회
3부 : 다과회


안내문을 읽으며 문득 파리의 또다른 한인신문 <오니바>(ONIVA)의 하석건 편집위원의 말이 떠올랐다. 지난해 말 오니바 109호 지면을 통해 하 위원은 파리의 한인회가 '한인 화합과 친선'을 명복으로 다과회와 야유회 등에 치중해 온 사실을 지적하고 한인회도 이제 현안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라며 '떡은 그 다음에 먹어도 늦지 않다'고 새로 선출된 한인회장에게 일침을 가한 일이 있다. '떡은 그 다음에 먹어도 늦지 않다. 그렇다. 제발 떡은 그 다음에, 아니 나중에 먹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