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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장을 오르내리는 세츠죠샤(雪上車)
ⓒ 박도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10: 30, 객실에다 짐만 놓고 곧장 스키장으로 갔다. 리프트로 오른 후 다시 세츠죠샤(雪上車)에 실려 출발점으로 올라갔다. 최정상은 1305미터라는데 모두 20개 라인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적설량이 2미터 이상 쌓여서 스키장으로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한창 시즌 중으로 특히 가족 단위의 스키어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등에다 아이를 업고 앞에다 안은 채 아내와 나란히 활강하는 장면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바닥에 쌓인 눈이 아주 깨끗했다. 무릎까지 빠졌다. 자작나무 숲 속에다 눈으로 차상을 만든 후 거기서 버너로 눈을 녹여 커피를 끓여 마셨다.

▲ 눈을 녹여 커피를 끓여 마시다(오른쪽 김광회, 가운데 필자, 왼쪽 스키장 직원)
ⓒ 박도
12: 50, 오늘 점심 장소는 하나마키(花卷)에 있는 ‘완코(碗子) 소바’라는 메밀 국수집이다. 이 국수집은 다이쇼 12년(1923년)에 창업한 곳으로 일정한 돈을 낸 후, 한 젓갈 정도의 양을 담은 소바를 몇 번이든 자신의 양껏 먹을 수 있었다.

시중드는 종업원이 흥을 돋우는 추임새와 함께 국수 그릇이 비면 빠른 손놀림으로 새 국수를 계속 담아준다. 보통 남자는 60그릇, 여자는 40그릇 정도라는데, 나는 50그릇 정도 먹으니까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창업 후, 지금까지 이 집에서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이 203그릇을 먹었다고 하는데, 우리 일행 중에서는 아오모리현 사카모토씨가 98그릇으로 가장 많이 먹었다. 알고 보니 그는 여태 총각이었다.

완코소바의 유래는 옛날 이 지역의 영주가 한꺼번에 여러 손님이 먹을 만큼 국수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다 보니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소바를 삶는 대로 조금씩 골고루 대접한 데서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바 집은 해마다 한 차례씩 소바 많이 먹기 전국대회도 가진다는데, 올해는 2월 11일에 연다고 포스터까지 요란하게 붙여놓았다. 내가 보기에는 고도의 상술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자기 가게에 와서 먹은 것을 증명한다는 나무메달을 만들어 가게에다 진열해 놓고 하나에 350엔씩 받고 팔고 있었다.

우리네 생각으로는 국수 값을 받았으니 거저 줄 만한 데 천만의 말씀이다. 국수도 팔고 메달도 팔고 이래저래 수입을 잡고 있었다. 이런저런 소문이 일본 전국에 나서 이에 한몫 끼려고 일부로 예까지 찾아온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명품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화제를 만들거나 그 주인공이 되려는데 광적이다. 우리가 찾은 그 날도 도쿄에서 세 아가씨가 여행 중에 일부러 들러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 종업원이 담아주는 대로 그릇을 비우는 고객들
ⓒ 박도
일본은 이런 명품을 쫓거나 즐기거나, 혼자 골방에서 명품을 만들어내는 마니아들의 천국으로, 그것이 바탕이 되어 세계 최고의 상품을 만들거나 최고의 기술국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코소바 취재하기에 여념이 없는데, 이 지방 이와테일보사의 간다 유키(神田由紀) 기자가 우리 일행을 취재하러 왔다. 나에게 이와테의 첫 인상을 묻기에 “엄청난 눈에 놀랐다”고 대답했다. 그밖에 몇 가지 질문은 생각나는 대로 답해 주었다.

14: 30, 그동안 3박 4일 동안 동행했던 아키타현 후지와라와 아오모리현 사카모토가 떠나고, 이어 아키타현 관광과 부주간 오기와라 켄이치와 아오모리현의 주사 곤 마유코(여)가 대신 우리와 동행하게 되었다. 사람의 정이란 무섭다. 피차 그 새 정이 들어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몇 차례나 나눴다. 그들은 눈자위가 붉었다.

참 믿음직한 공무원이었다. 어느 책에서 본 바, 오늘의 일본을 지탱하는 것은 일본의 공무원들이라고 했다. 며칠 간 지켜보았지만 이들은 매우 성실하고, 품위를 지키며 매사에 절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우리가 다니는 곳이 모두가 자기네들 관내 업체인 데도 오히려 이들이 업주에게 '무엇을 도와줄 게 없느냐?' '애로 사항이 무엇이냐?' 고 진지하게 물으면서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자세를 보였다.

출장 여행 중이니까 과음도 할 만하고, 일상에서 해방된 기분도 풀 수 있으련만, 조금도 몸가짐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아!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언제 제자리를 지키고 바른 처신을 할까?

▲ 츄손지 절에 있는, 어린 아이의 죽음을 조상하는 불상
ⓒ 박도
내가 30여년 학교에 있어서 교육공무원(주로 장학사)들의 처신은 잘 알고 있는데, 일선 학교에 나오면 밥이나 얻어먹고, 교통비나 받아가고, 학교 비리 조사 나와서는 제대로 조사는커녕, 오히려 면죄부만 주고 떡값만 챙겨갔다. 그리고 이들이 권력 앞에 춤추거나 돈을 뿌려서 교육장, 교육감이 되어 대한민국 교육계를 움직였다. 물론 전부가 다 그러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사실 공무원만 청렴결백하면 우리 사회는 저절로 정화된다. 지금도 검찰, 경찰, 교육 그리고 일선 민원 담당부서의 공무원들이 바로 서면 얼마든지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을 수 있다.

15: 45, 모쓰지 절(毛越寺)에 이어 츄손지 절(中尊寺)을 보여줬지만, 솔직히 말해서 일본 사찰은 별로 볼 것도 없고, 신심(信心)도 전혀 우러나지 않았다. 절만큼은 우리나라 절이 일본보다는 훨씬 낫다. 츄손지 절 옆에 미야지와 켄지의 시비가 있었으나 날이 저물고 퇴락하여 비문을 읽을 수 없어서 섭섭했다.

18: 30, 갑자기 구름이 몰려들어 금세 어두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는 비상등을 켜고 눈길을 잘도 달렸다. 나이든 노련한 이즈미야 기사가 믿음직스러웠다.

20: 05, 만찬 겸 내일 떠나는 구로다 송별회가 조촐하게 있었다. 모임 마무리로 나에게 한 마디 청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내가 가장 연장자요, 구로다와 교분을 생각해서 즉석으로 몇 마디 했다.

▲ 송별회 뒤 일동 기념 촬영 (왼쪽부터 구로다, 윤용수, 필자, 오기와라, 윤영진, 김자경, 김효석, 이기연, 박성희, 김영석, 김석준, 곤, 김광회)
ⓒ 박도
"한국과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유럽대륙, 중국대륙을 거쳐 가장 가까운 일본을 이제야 찾았다. 며칠간이지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그리고 일본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지난날 한국과 일본은 좋은 때도 있었지만, 두 나라 사이에 불행한 때도 있었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가 ‘가까운 이웃’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함께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내가 한 문장을 말하면 김자경씨가 일어로 통역을 하는 식으로 나의 마무리 말이 끝났다. 갑자기 구로다가 벌떡 일어나서 “대한민국” 선창 연호하고는 “짜 짝짝 짝짝” 박수를 쳤다.

실내에 있는 일동 모두 대한민국 연호와 박수로 월드컵 열기가 재현됐다. 우리 측에서 대한민국만 연호하기가 미안했음인지 “닙뽄” “닙뽄”도 몇 차례 연호했다.

아! 정말 앞으로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오늘밤의 열기처럼 선린 우호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겠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현실을, 일본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할 테다. 물론 일제 36년간의 치욕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일 양국간 견원지간의 고리는 두 나라 모두를 위해 언젠가는 끊어야 한다. 그것은 결자해지로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일본의 진정한 사과에서 출발해야 함을 물론이다.

일본은 그만한 아량이 없는 소아(小兒) 국가인가!

▲ 앗피 고겐 스키장 전경
ⓒ 박도
▲ 천연의 눈으로 다져진 슬로프
ⓒ 박도
▲ 스키 교사가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 박도
▲ 어린이 스키어들
ⓒ 박도
▲ 완코소바 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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