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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상임이사인 이희자씨
ⓒ 박형아
"우리가 과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인가."

태평양전쟁 피해자이자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협의회) 상임이사인 이희자(61)씨는 8월 15일을 앞두고 정부 당국에 국적포기서를 제출할 계획이라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31일 오후 5시경 서울 청량리에 있는 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이씨는 "일제 강점기 아버지의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당했던 나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 정부로부터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국적 포기를 주장하는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이씨는 "나는 지난 15년동안 아버지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일본 정부와 많은 소송을 벌여왔지만 그 때마다 일본은 65년 '한일협약'을 근거로 들어 재판에서 패소시켰다"면서 "실제 65년 '한일협정'에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 개인의 청구권마저 포기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한일협정' 관련 문서 공개를 요구했으나 일본측 이익 보호를 이유로 거부당했다"고 분노했다.

이씨는 "그렇다면 적어도 정부가 피해자들의 생사확인 등 진상규명이라도 해줘야 하는게 아니냐"며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을 비판했다.

그는 "우리는 국민으로서 도리를 다 하고 있는데 정부는 우리를 국민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며 "우리는 국민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국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라로부터 국적 포기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씨는 "지금 위안부 할머니, 강제징용자 등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은 한계 수명에 다달아 있다. 3~4년이면 이 분들 3분의 1 이상이 돌아가신다"며 "노무현 정부는 '개혁 정부'라 자칭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시급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협의회가 피해자 단체로 속해 있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제정추진위원회'(이하 위원회)는 7월 31일 "일제강점시기 피해자들은 정부의 무관심에 항의하는 뜻으로 국적포기각서를 정부에 제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위원회의 공동집행위원장 최봉태씨는 이날 전화 통화에서 "지난 7월 7일 위원회의 기획회의에서 국적포기의 의견이 공식화되었다"며 "정부의 한일협정 문서공개 거부와 일제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추진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이 국적포기선언의 결정적 이유가 됐다"고 밝혔다.

최씨는 "정부는 국민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우리 정부는 일본 못지 않은 가해자로 비춰지고 있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최씨는 "이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명예회복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이들을 위한 법안이 통과하려면 적어도 2-3년 소요될 텐데, 7,80대에 접어든 이들을 저승에서 보상해주라는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씨는 "현재는 피해자 회원 300명 정도가 국적포기 각서를 제출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들의 각서는 광복절을 앞둔 8월 13일 청와대에 전달하고 노 대통령과 면담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향후 청와대가 이를 무시할 경우, 현행법 상 이들의 국적 포기가 가능하지는 않지만 법무부에 국적포기소송까지도 불사할 계획이라고 한다.

"보상은 제쳐두고라도 진상규명이나 명확히 했으면"
태평양 전쟁 피해 사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협의회)의 상임이사 이희자(61)씨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태평양 전쟁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씨의 아버지는 이씨가 두 살이던 해 - 태평양 전쟁이 한참 진행 중이던 1944년 -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 당했다. 당시 이씨의 어머니는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이씨가 열살 되던 해에 재혼을 했다.

무남독녀였던 이씨는 "내가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승계 받지도 못 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는 내가 딸이이서 재혼을 서둘렀다"라고 했다.

이씨의 동네사람들은 '딸 하나 믿고 어떻게 사냐'며 이씨의 어머니께 재혼을 권했고, 이씨의 어머니는 '아들 하나만 있었더라면'하고 아쉬워하며 재혼을 했다고 한다. 이씨는 "그렇게 어른들의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이씨는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는 채 어린 나이에 겪었던 그 상처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르다"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라고 했다

그 때부터 이씨는 "내가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위해 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 작은 명예라도 살리는 일이다"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씨는 "아버지의 생사확인부터 시작해 사망했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를 분명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씨는 "그 때, 그 어릴 때 했던 결심이 15년째 내가 이 단체에 몸담으며 운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씨는 이 단체에서 활동하던 중 아버지의 사망소식과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71년도에 일본에서 한국 정부로 넘어온 문서에서 아버지 사망소식을 확인했다"고 한다. 문서에 이씨의 아버지는 '45년 6월 11일 중국 광서성 180병참 병원 사망'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씨는 이 문서를 92년도에나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씨는 "96년도에나 비로서 이 단체를 통해 알게된 일본인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사망경위를 일본방위청으로부터 전달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와 관련된 기록문서는 일본의 야스꾸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고 했다.

이씨는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이런 명백한 기록을 왜 가족한테 알리지 않는지, 아버지 사망 사실과 원인을 알게 된 후 더더욱 화가 난다"고 말했다.

이씨는 "일본 눈치를 보며 진상규명조차 못하는 한국 정부는 일제식민지 치하 때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일본에게 지배 당하고 있는게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록문서가 일본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꾸니 신사에 합사돼 있는 것은 일본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목숨을 바쳤다는 의미냐"며 분노했다.

이씨의 소망은 "끝까지 진상규명을 해 아버지의 명예를 살리는 일"이라며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다른 피해자인 이금숙(59)씨 역시 43년 태평양 전쟁 때 징용당한 아버지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씨는 "전쟁 후 아버지가 안돌아오셔서 돌아가신 걸로 생각하고 살아왔다"며 "나 같이 생사확인도 못한 사람이 많다"고 이야기했다.

이씨는 "우선 아버지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 싶다"며 "가능하다면 아버지 유골을 찾아서 25년 동안 혼자 사시다가 63세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합장이라도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 박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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