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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청주의 명품, 후쿠코마치 양조장
ⓒ 박도
명품의 산실

2003년 2월 7일 맑음, 그러나 지역에 따라 눈 또는 비
04: 00, 오싹한 기운에 눈이 떠졌다.그러나 몸은 의외로 가뿐했다. 나는 역마 체질인가 보다. 몇 해 전에는 무더위 속에 중국대륙을 2주일간 강행군해도 끄떡없었다. 시간이 일러서 지도와 여행 가이드 책을 보며 목욕시간을 기다렸다.

06: 00, 여관 내 욕실로 갔더니 종업원이 청소를 하다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 마치 계란 썩는 냄새같은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온천 맛만 조금 보고 나와서 짐을 꾸렸다.

07: 00, 여관을 출발했다. 여관 주인과 종업원이 길에 도열해서 우리가 떠나자 90도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럴 때는 그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답례하는 게 예의라고 했다.

아침 밥은 여관에서 싸준 주먹밥이었다. 김 반 장에 찰밥을, 그 속에는 소스를 넣었다. 한 끼 요기로는 충분한 별미였다.

07: 30, 버스에 오르자 안내인 아이코씨가 아주 반갑게 아침 인사를 했다. 우리 일행에게 온천을 몇 번 했느냐고 물었다. 한두 번 했다고 했더니, 세 번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도착하자마자, 식사 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아무튼 일본은 온천도 많지만 일본사람들은 온천욕도 무척 즐기나 보다.

09: 00, 아키타현 유자와 시에 있는 일본 청주의 명품 후쿠코마치(福小町) 양조장으로 갔다. 1615년에 창업해서 오늘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니 자그마치 388년의 역사다. 그런 역사와 명성에 비해 공장은 낡고 사무실도 초라해 보였다.

▲ 양조장 내부, 여태 재래의 방법으로 술을 빚었다
ⓒ 박도
이곳도 술을 빚는데 여태 옛 방식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수공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장 지배인 말이 옛 방식 그대로 빚어야 그 맛이 그대로 난다는 것이다.

이 양조장의 술맛 비결을 물었더니, 깨끗한 물과 좋은 쌀 그리고 삼나무 통 때문이라고 했다. 막 빚은 술을 맛보았더니 상큼한 향기와 혀끝을 사로잡는 감칠맛이 있었다.

▲ 최상품의 쌀을 원료로 한다고 했다
ⓒ 박도
조금 유명해졌다고, 조금 돈을 벌었다고, 새 공장을 짓거나 다른 사업을 확장하지 않고, 옛 것을 그대로 지키면서 옛 맛을 그대로 지켜나가는 게, 명품 명성을 유지하는 비결인가 보다. 우리나라 기업주들은 조금 돈벌면 금세 사업을 확장하거나 문어발식으로 여기저기 덤비다가 끝내 모기업마저 날려버리곤 한다.

짧은 역사와 여기저기 분산된 역량으로는 결코 명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명품은 오랜 세월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념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이 양조장에서 배웠다.

떠나오려는 데 지배인이 방명록을 꺼내놓고 나에게 한 마디 적어달라고 청했다. “名品 悠久 歷史 所産(명품유구역사소산)”이라고 썼더니 지배인과 동행 일본 관리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좋아했다.

▲ 양조장 한편에 전시된 박물관
ⓒ 박도
이와테현의 구로다 주사는 방명록에 내가 쓴 서명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들은 우리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을 죄다 기록해서 보고서로 남기고 상부에 보고할 테다. 일본 공무원들의 보고서는 자세하고 정확하다는 데 이미 정평이 나 있지 않은가?

그네들은 보고 배우고 기록하는 데 매우 극성, 아니 광적이다. 몇 해 전에는 JAL기의 한 승객이 후지산으로 추락하는 명재경각의 순간에도 기록을 남겨서 해외 토픽이 되기도 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나라 독립투사에 관한 투쟁 기록도 그들의 기록이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제시대 누가 진짜 애국자인지 그들의 기록을 봐야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독립투사들이 기록을 남기면 증거가 되기에 일부로 남기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공장 안은 박물관으로 별 개 다 전시돼 있다. 김광회 리포터가 짚신 같은 걸 뭐냐고 묻자, 안주인이 ‘후미다라’라고 하면서 바깥으로 나가서 시범까지 보여준 바, 눈길을 내는 데 신었던 옛 일본인의 짚신이었다.

▲ 양주장 안주인이 우리를 위해 후미다라를 신고 시범을 보여줬다
ⓒ 박도
10: 30, 이나니와 우동 공장으로 갔다. 이제 본 것은 자료관이라 생산 공정은 보지 못했던 바, 오늘은 직접 볼 수 있었다.

▲ 여직원들이 우동 면발을 일일이 뽑고 있다
ⓒ 박도
공장 건물은 한적한 시골 마을 외진 곳으로 아주 고즈넉했다. 밀가루에서 우동제품이 되기까지 9단계를 거친다는 데 하나같이 손으로 반죽하고 뽑고 늘리고 건조시키고 자르고 포장했다.

그런데, 이런 힘들고 따분한 일을 모두 일본의 젊은이들이 했다. 아마 우리나라라면 이런 일을 십중팔구 외국인 노동자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취재진의 질문에 “우동의 맛은 손맛이다” “자신의 일에 만족한다” “우동이 좋아서 이 일을 하고 있다”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사전 교육 여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밀가루 반죽을 하고 면을 뽑고 면발을 늘리는 그들의 작업하는 모습이 무척 진지했다.

이 공장에는 40여 직원이 하루 700킬로그램 정도만 생산해서 자기네 직영점에서만 판매한다고 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동 가락이 마치 기계로 뽑은 양. 굵기가 모두 일정했다. 전 직원이 전력투구로 소량 생산해서 그 명성을 이어가면서 최고가를 받나 보다.

나는 일행보다 먼저 공장을 나와 마을 언저리를 스케치했다. 온통 눈 세상이었다. 가까운 곳에 유치원이 있었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눈 장난을 하고 있었다.


▲ 손으로 뽑은 면발을 홍두께로 밀어 늘이고 있다
ⓒ 박도
▲ 포장 전에 불량품을 일일이 골라내고 있다
ⓒ 박도
▲ 언저리 산하가 온통 눈 세상이었다
ⓒ 박도
▲ 어린이들이 눈 장난을 하고 있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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