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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농사로 성공한 이병일 안점순 부부 (거봉 하우스 앞에서)
ⓒ 박도
외사촌 이재화형으로부터 동산리 마을에 귀농해서 하우스 거봉 포도로 성공한 농사꾼 부부가 산다는 말을 듣고 지난 주말에 김천으로 달려갔다.

내 외가인 김천시 어모면 다남동(동산리)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늘 포근하고 인정이 많은 고장이다. 취재길은 늘 혼자 다녔는데 이 마을의 교통이 불편함을 알고 아내가 동행을 자청했다.

하지만 아내 차가 고물이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갑자기 에어컨이 작동이 안 돼 창문을 열고 가기 위해 옥천에서 국도로 나왔다.

마침 정지용 생가가 옥천 톨게이트에서 가까운 곳이라 언제 한 번 꼭 들르고 싶었던 그곳을 '구름에 달 가듯이' 들른 다음 김천으로 달렸다. 한적한 국도를 유유자적 달리는 기분이 여간 상쾌하지 않았다.

온통 들판이 초록으로 논들은 벼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밭들은 포도 알이 영글고 있었다.

어느 들판에는 '베트남 처녀와 결혼할 사람은 농촌 총각 장가보내기 운동본부로 080- xxx-xxxx'이라는 플래카드가 마음을 아프게 했다. 지금도 농촌 총각의 결혼 문제가 여간 심각치 않나 보다.

이튿날 아침, 이병일(55) 안점순(49) 부부가 포도 하우스 농장으로 가는 길에 트럭을 타고 외가로 찾아왔다. 초등학교 시절 겨울방학 때 외가마을 무논 얼음판에서 함께 썰매 탔던 그를 40여년만에 다시 만난 셈이다. 인사를 나눈 후 얼굴을 살펴보니 옛 모습이 조금은 남아 있는 듯했다.

"참 찢어지게 가난했지요. 군대에서 제대한 후 결혼도 하고 아이도 한 입 두 입 늘어가는데,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그때는 고향에 농사지을 땅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무작정 식구를 데리고 도시로 나갔지요. 객지에서 안 해 본 게 없이 닥치는 대로 별 장사 다 해 보았습니다. 7년 동안 죽자 사자 발버둥을 쳤으나 빚만 늘었습니다.

아들놈이 학교 가면서 학용품 산다면서 돈을 달라고 하더군요. 돈 없다고 했더니, '그라믄 아빠 치앗뿌리라'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는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 온 들판이 포도밭인 김천시 어모면 다남동 일대
ⓒ 박도
그 길로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남동장 이병만씨가 반겨 맞았다. 먹을 양식도 대주고 여기저기 농사지을 땅도 구해 주었다. 7년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고향도 많이 변해 있었다.

제일 큰 변화는 고향사람, 특히 젊은이들이 도시로 나가서 빈 집도 늘어났고, 농사지을 땅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남의 땅을 잔뜩 얻어서 몇 년 뼈 빠지게 농사지었다.

수중에 몇 푼 모이자 마침 재 넘어 찬물 나는 땅을 싼 값에 샀다. 그 땅은 농사가 잘 안되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곳에 산의 흙을 파다가 10여m 메웠다. 그런 후, 더덕을 심었다. 실패였다.

마침 처가(충북 영동 매곡마을)에 갔더니 거봉 포도농사를 하고 있기에 그 묘목을 얻어다가 심었다. 동네 어른이나 지나가는 사람 모두가 그 땅에는 세상에 없는 걸 갖다 심어도 실패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병일 안점순 부부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병일씨는 전국의 포도 재배 농가로 성공한 곳을 10여 차례 이상 찾아다니며 포도 재배 기술을 배웠다. 남의 기술을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기술을 개발했다.

거봉 포도의 제일 큰 단점인 듬성듬성 달리는 포도송이를 캔벌리 포도송이처럼 다닥다닥 개발하는 것과 송이의 포도 알이 모두 일정한 크기로 영글게 하는 기술이었다.

▲ 탐스럽게 익은 포도를 수확하는 이병일 안점순 부부
ⓒ 박도
마침내 포도농사를 시작한 지 3년만에 첫 수확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으로 대성공이었다. 전국 최고 품질로 인정도 받았다.

차상을 물린 후 그들 부부의 안내를 받으며 거봉 하우스 단지로 갔다. 지난 날 겨울철이면 썰매 타고 여름철에는 천렵을 하던 곳이 그 새 거대한 거봉포도 하우스 단지로 변해 있었다.

내가 그곳을 찾은 날이 6월 하순으로 다른 일반 포도는 막 송이가 맺어 파랗게 자라고 있는데 병일씨의 거봉포도는 한창 출하되고 있었다.

"열심히 하니까 안 되는 게 없습디다. 남보다 앞서 가려고 늘 배우는 자세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하우스 곁에다가 농막을 지어놓고 거기서 살다시피 포도나무에 공을 들였다. 또 토질을 연구하여 거기에 맞는 퇴비를 쓰고, 포도나무 가지치기도 모두 그들 부부가 손수한다고 했다.

"자식 키우는 것보다 더 공을 들였지요. 모두가 실패한다고 하던 이 땅에서 전국 제일의 거봉 포도를 가꾸어 내기란…."

거봉 하우스에 들어가자 탐스런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달렸다. 밭에는 잡초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저희 밭에는 금비도 제초제도 일체 쓰지 않습니다. 오직 퇴비만 쓰고 풀은 제 손으로 일일이 다 뽑습니다."

그들 부부에게는 당당한 농사철학이 있었다. 그것은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좌우명이었다.

판로에 어려움이 없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다소 힘들었지만 제 포도가 보기도 맛도 송이도 충실하다는 입소문이 번지자 큰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요즘 소비자들은 과일을 눈으로 먹기 때문에 맛도 좋아야 하지만 때깔도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상품의 질로 승부를 걸어야지요."

▲ 이병일 씨가 생산한 하우스 거봉포도 '꿈앤들' 상자
ⓒ 박도
농막 안은 밭에서 따온 포도를 선별해서 포장하는 곳으로 전자저울에다 2kg 정량에서 한 치 오차도 없이 달아서 투명 셀로판으로 포장했다. '꿈앤들'이란 상품명에 "꿈엔들 잊으리. 새콤달콤한 그 맛! 하우스 거봉"이라는 '카피'까지 새겨 넣었다.

"1등 상품만 생산하면 판로에 문제가 없습니다. 현재 저희 집 상품은 주로 하나로 마트와 전국 유명 백화점에 납품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전국 최고의 품질을 생산하기 위해 일등 농사를 지어야지요. 왕년의 홈런왕 이만수 선수가 그 비결을 남보다 더 열심히, 남이 잠잘 때 자기는 옥상에 올라가서 배트를 휘둘렀다는데, 농사꾼도 마찬가집니다."

현재 짓는 농사와 지난해 연 수입을 물어봤다.

"포도 2500평, 벼농사 7000평, 자두 1000평입니다. 지난해 수입은 5천만 원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난해는 월드컵 열기 때문에 포도 값이 kg 당 4, 5천 원 정도로 예년의 반밖에 못 받아 고전했어요(올해는 2kg 한 상자에 1만4000원 내외). 월드컵 특수를 누릴 줄 알았는데 완전 예상이 빗나갔어요. 4강까지 올라가자 사람들이 축구 열기 때문에 과일 먹을 생각도 잃었나 봐요.

그 전 해(2001년)는 7, 8천만 원 정도 수입을 올렸어요. 제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영농자금 단 돈 20만 원 빌리는 데도 보증 서 줄 사람이 없었는데, 지난 해 집 지을 때는 보증인 없이도 농협에서 5천만 원이나 빌려 주더군요."

금방 딴 포도를 맛보라고 했다.
"저희 포도는 농약을 치지 않았으니까 그대로 드셔도 됩니다."

▲ 새콤 달콤 향이 짙고 잘 익은 거봉포도송이
ⓒ 박도
몇 알 까서 넣자 입안이 금세 행복해졌다.
"저희는 농한기가 없습니다. 일년 내내 논이나 밭에서 살지요. 포도 출하가 끝나면 잠시 틈이 있을 뿐입니다."

그때는 선진국의 농업기술을 배우고, 그들의 농촌은 어떤가 싶어서 부부가 해외 견학도 간다고 했다. 농촌에 사니까 얼굴이 좀 검은 게 흠이지만 해외에서도 주머니 돈만 있으면 어디가나 굽실거리더라고 함박 웃었다.
"제 수입이면 아마 대기업 이사급은 될 겁니다."

병일씨는 농촌이 피폐해지고 공동화되어가는 현실이 매우 가슴 아프다고 했다.

"이대로 10년 지나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겁니다. 공산품 수출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농산물 자급자족도 더없이 중요하고, 또 우리 농촌도 살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농촌을 망가뜨려 놓은 뒤 강대국들이 농산물 값을 천정부지로 올리거나, 식량을 무기화시키면 그때는 그대로 당합니다. 지금 저희 마을에 마흔이 넘도록 장가 못간 청년이 넷이나 됩니다. 색싯감들이 빌어먹어도 도시로만 시집가는 거예요."

그래서 연변, 필리핀, 월남 아가씨를 신부로 맞이하지만, 돈만 떼먹고 달아나는 아가씨가 속출해서 또 다른 아픔을 양산한다고 했다.

"농촌에서도 열심히만 살면 도시 소득 못지않게 올릴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는 농촌이 도시보다 더 잘 살고 있더군요, 우리나라도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굳이 당신이 지은 예쁜 양옥집으로 안내한 후, 거실에서 손수 담은 포도주를 대접하면서 '젊은이들이 정착하는 고향', '객지로 나간 사람이 돌아오는 고향'을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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