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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반, 겨울에 태어난 아기는 2개월이 되기도 전에 거반 죽게 생겼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밖에 없는 빈농에서 병원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고, 향린교회의 도움을 받아 의사선생님을 소개받고는 달려간 곳은 산부인과였습니다.
계란 두 줄을 가지고 의사선생님께 "이 아이 수술이라도 받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했다죠. 그 때 어머님은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이 아이 살려주시면 목사로 만들겠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일이라면 목사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반적인 생각에 따른 기도였겠지만 어머님의 기도대로 저는 목사가 되어 작은 시골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저의 생명의 은인이 되시는 선생님을 아내 될 사람과 찾아 뵈었습니다.
"아니, 젊은이가 정말 그 아기가 맞아?"
어머니를 통해 건강하게 자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저 인사치레 정도로 들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대로 되었구만. 축하허이. 신학을 한다면서? 어머니가 계란 두 줄 가지고 와서 수술해 달라고 하는데 사실 나는 포기했었지. 살아도 정상적인 삶을 못 살 줄 알았어.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키도 크고, 건강하니 하나님의 은혜지…."
목사안수를 받고 나의 영역을 하나 둘 찾아가며 나름대로 사랑을 받으며 목회를 하다가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안식년 핑계를 대고 무작정 일년을 쉬면서 농사일도 하고 캄보디아에 다녀오더니 갑자기 농촌목회를 하겠다는 아들을 부모님들은 이해하시고 보내주셨습니다.
늘 곁에서 손주들 재롱을 이제껏 보셨는데, 손주들이 영 눈에 밟히시는 모양입니다. 너 같으면 서울에 있어도 자리가 날텐데 시골까지 왜 가려고 하느냐며 그 서운한 속내를 비치시긴 했어도 다 우리같이 생각하면 농촌교회는 누가 섬기겠냐고 자식의 길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야, 시골 살면서 너무 자주 서울에 오지 마라. 아예 그 곳 사람이 될 작정하고…."
시골에 푸성귀가 더 많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늘 옥상에서 키우신 것들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시곤 합니다. 어머님의 소포를 받아볼 때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죠.
아버님이 매직펜으로 쓰신 주소를 보면 늘 "김민수 목사님"이라는 존칭입니다. 소포의 내용물만 보면 서울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시골에서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입니다. 만일 소포의 속내를 볼 수 있다면 우체부가 분명 주소를 잘못 적었을 거라며 서울로 보낼 것입니다.
"어머니, 꽃들이 아주 예뻐요. 나도 요즘 산책하면서 꽃들을 사귀고 있는 중인데 나중에 어머니 깜짝 놀라게 해 드릴께요."
문명의 이기에서 멀리 계시는 부모님, 그렇다고 PC방에 모시고 가서 그동안 썼던 꽃을 찾아 떠난 여행이야기를 보여드릴 수도 없으니 나중에 출력을 해서라도 보내드려야겠습니다. 그러면 목회는 안하고 다른 짓만 한다고 혼나겠지요.
아주 급한 일 때문에 잠시 다녀온 서울이었기에 친구들에게 연락도 못했습니다.
어머님의 옥상, 그런데 이 글을 읽으시면 아버님이 서운해하실 것 같습니다. 같이 가꾸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아버님, 서운해하지 마세요. 어머니라는 말속에는 아버님도 같이 들어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