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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군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75년 여름 방학을 맞은 경희대 대학생 서른 명이 넘는 인원이 농활을 왔습니다. 이제 나에게도 아련한 추억으로 멀어져 가는 농촌봉사 활동 말이지요. 국문과로 기억됩니다. 우리 집에서 잠을 잤습니다. 74년 겨울 새 집을 사서 처음 맞이한 여름입니다. 어찌 그 깡촌까지 대학생들이 몰려 왔는지는 모릅니다.

어머니 아버지께서는 대학생들에게 선뜻 집을 내주셨습니다. 그런 인심이 평소 후덕하셨습니다. 마당 깊은 집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우리 집은 넓어서 대학생들이 와도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방 2개를 내줘도 괜찮았으니까요. 그게 제가 아홉 살 초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나는 산골마을에서 특혜 받은 아이가 되었지요. 아이들도 문간을 기웃거렸고 손으로 끌고 들어오면 밤새 집으로 돌아갈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꽤 많은 청탁이 들어왔습니다. 그 누나 좀 만나게 해달라구요.

제 고향은 전남 화순군 북면 방리 양지마을입니다. 마을이 터를 잡고 있는 곳이 해발 300m 이고 바로 앞산이 백아산(810m)이고 마당바위는 소설 <태백산맥>과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의 주무대이기도 합니다. 앞뒤로 산밖에 없습니다. 꽉 막힌 곳이지요. 국어학자들이 가끔 다녀가 전라도 사투리를 연구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6·25 때 빨치산 도당사령부가 있던 마을이기도 하지요. 그런 산골 마을에 그 당시 60여 호가 살았습니다.

대학생 언니들은 서울에서 광주까지 왔답니다. 광주고속(현 금호고속)의 전신인 빨간 중앙여객을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3시간 가량 걸려서 집으로 왔으니 얼마나 먼길을 왔는지 모릅니다. 호남고속도로가 왕복 2차선으로 거북이 운행을 해야했으니 족히 서울서 6시간은 타고 왔을 겁니다. 거기에다 광주공용터미널에서 한시간 남짓 차를 기다리며 라면을 끓여 먹었다더군요. 3시간 여 또 차를 탔으니 내려오는 것만 하루가 꼬박 걸렸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첫날은 저녁 7시가 다 되어 도착했습니다.

ⓒ 김규환
멋지게 차려입은 잘생긴 형들과 예쁜 모자에 하얀 레이스 달린 뽀얀 살갗을 가진 누나들은 퍽 내 맘을 설레게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잘 생긴 형들을 결코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분바른 아리따운 누나들이 제 손을 잡고 다니는데 왜 형들을 따라 다니겠습니까.

오전에는 혜숙이 누나 오후에는 지원이 누나, 내일은 또 다른 누나들이 손목을 잡고 끌어줬습니다. 물론 나에게도 누나가 있었으나 누이는 6학년 때라 대학생 누나들에서 나는 향기와는 달랐습니다. 그 상큼한 맛을 느낄 수는 없었기 때문에 열흘 남짓 친누나는 찬밥 신세였습니다.

내가 똑똑하다고 말해주고 이뻐죽겠다고도 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잘 생겼냐고도 했지요.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그 누나들 얼굴과 이름이 지금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 거짓말 때문에 더욱 그립습니다. 나를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예뻐해 준 적은 없었다고 봅니다.

일찌감치 밥 해 먹고 농사지으러 나가는 대학생 형과 누나들의 모습을 보고 학교에 가기 싫었습니다. 마지못해 학교에 가서는 이제나저제나 하며 학교가 끝나기를 바라며 마지막 종 울리기만 목놓아 기다렸습니다.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니 공부도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학교를 파하면 달음박질을 하여 집으로 와 누나들 품에 안겼습니다.

낮 시간은 잘 떠오르지가 않네요. 아직 방학을 하지 않은 내가 학교 가 있을 시간이니까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보면 대충은 짐작이 갑니다. 대학생들은 집집마다 거르지 않고 김매는 일을 돕는 게 첫번째 일이었습니다. 마을 구석구석 후미진 곳을 찾아다니며 오물을 처리하고 어른들을 도와 (*)울력도 했습니다. 가끔은 산골짜기에 가서 (*)흔들모를 하기도 했습니다. 보리 타작을 돕는 학생들도 있었지요. 하여튼 동네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거들어 줬습니다.

하지만 그 때 대학생들은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낭만을 가져다 줬습니다. 형네들과 누나들끼리 기타를 치며 부르던 포크송 가락은 도시를 접하지 못했던 우리에게는 꿀맛이었답니다. 아버지께서 애인처럼 껴안고 있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을 라이브로 듣게 되다니요.

80년대 후반 커서 농활 갔을 때하고는 딴판이었지요. 형들은 그 먼길을 기타를 잊지 않고 세 개나 갖고 왔습니다. 다른 산골 마을 아이들보다 기타를 먼저 접하게 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그게 악연이 되고 말 줄이야. 그 뒤로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타든 무슨 악기고 연주해줄 거라 믿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까지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아무 것도 없다). 저녁밥을 서둘러 해 먹고 학교 운동장으로 가면 4개 마을 어린이들이 제비처럼 몰려와 음악과 맛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길 기다렸습니다. 그림도 왜 그리 잘 그렸던지…그리고 나서 집에 가면 밤 10시가 넘었드랬습니다.

ⓒ 김규환
밥을 해 먹을 때 신기한 채소를 여러가지 처음 접하게 되었지요. 양배추와 꽈리고추, 식용유, 설탕, 라면, 카레입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거의 구경도 못해봤던 기이한 물건들이고 재료였지요.

양배추를 도마에 올려 날렵하게 푹푹 썰더니 거기에 양파를 썰어 넣고 고추장 풀고 찌개를 끓였습니다. 얼마나 달작지근하던지 그 맛 잊기 어렵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 이야기지만 꽈리고추에 대한 내 생각을 확 뒤집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집에서 먹던 반찬 중에 여름에는 멸치 넣고 간장으로 간을 하여 작고 여린 풋고추를 팍팍 졸여놓아 식어서 숨이 죽으면 쪼글쪼글 쪼그라듭니다. 그런데 글쎄 애초에 쪼글쪼글 꽈리를 틀고 있는 못 생긴 고추가 있었던 겁니다. 그 시절에. 갖고 온 꽈리고추에 식용유를 조금 치고 들들 볶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라면도 한 두 번 먹어본 것 밖에 없는데 저녁때는 빠지지 않고 밥을 하고 김치찌개를 끓여서 그 위에 라면 몇 개를 넣어 먹더군요. 그러니 나는 저녁밥은 가족과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대학생들의 그 라면을 뺏어 먹었지요. 그 뒤로 붙임성이 그렇게 좋아진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친누나가 그러더군요. 기억을 더듬으려고 전화를 했습니다.

“누나 웬만한 것은 알겠는데 또 기억나는 게 없을까?”
“그때 카레도 갖고 왔더라.”
“아 그래요? 생각이 나지 않은데…”
“누나도 그때 처음 카레를 봤단다.”
“누나가 몇 학년 때인데요?”
“내가 6학년이었으니까 확실히 기억해. 감자는 집에서 줬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맞네.”

누나는 그 누리끼리하고 이상한 향이 나는 카레를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다고 합니다. 네 살이었던 막내 동생을 매일밤 학교가서 구경하고 엎고 왔다더군요.

1980년대 사진
1980년대 사진 ⓒ 신
또 한가지 빠트릴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주로 대학생 누나들이 밥과 찌개를 했는데 어떤 음식이든 간에 설탕을 반드시 넣었던 기억이 아주 새로웠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그 시절 조미료의 대명사 미원은 있었으나 설탕까지는 아직 침투하지 않았었지요. 그 날 뒤로 달디단 설탕 맛을 잊지 못하여 학교에 갔다 와서는 조미료가 설탕인 줄 알고 손가락으로 연신 찍어 먹었던 어린 시절이 이어졌습니다.

떠나기 전날 밤 닭장에 있는 토종닭 다섯 마리를 잡았습니다. 닭죽을 쒀서 동네 잔치를 겸했습니다. 나를 그리 아끼고 예뻐했던 누나들은 이른 아침 짐을 챙겼습니다. 10여 일 간의 긴 농촌 생활에 그 뽀얗던 얼굴과 손목 팔목도 구리 빛으로 그을렸습니다. 그게 우리들의 정이 쌓인 정도를 말해줬습니다.

“꼭 올 거제 누나?”
“내년에 또 오마! 우리 이쁜이 안녕.” 하며 볼을 만져줬고,
“반드시 올 거야, 우리 손가락 걸자!”며 오랫동안 손을 잡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이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며칠이고 어린 것이 삶의 의미를 잃고 밥맛도 잃었습니다. 그리 맹세를 했던 어여쁜 누이들과 형들은 다음해부터는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요? 너무 멀어서 못 오신 겁니까? 아니면 누가 섭섭하게 했기 때문인가요? 이제 그 꼬마가 40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있습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쯤 되는 나이로 당시 경희대 국문학과를 다녔던 형들이나 누나들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연락 좀 주세요. 28년 전의 일이니 한 분도 얼굴과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지만 그립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1980년대 사진
1980년대 사진 ⓒ 신안군



*울력: 일손이 모자라는 집에 시기를 놓쳐서는 안될 급한 농삿일이 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보수나 노동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도와주는 봉사적 노동협동 방식.
*흔들모: 못줄을 띄워 정조식으로 심지 않고 산골 다랭이 논은 어림잡아 모를 꽂는 모심는 방식의 하나. 예전일수록 이렇게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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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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