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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를 장기여행중인 미국인 청년 존이 타고 다니는 산악 자전거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평생 처음 보는 이인용 자전거를 한 라오스 할아버지가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있다.
아시아를 장기여행중인 미국인 청년 존이 타고 다니는 산악 자전거는 두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평생 처음 보는 이인용 자전거를 한 라오스 할아버지가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있다. ⓒ 김남희
끝없이 짐을 싸고 푸는 기약 없는 길 위에 오른 지 어느새 다섯 달째에 들어섰습니다. 지난 넉 달은 쫓기듯 불안한 발걸음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불안스레 흔들렸던 건 두고 온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 여행의 대가로 내가 이미 잃어버린 것들, 머지 않아 잃어버리게 될 것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 무릎을 꺾고는 했습니다. 내가 치러야 하는 계산서는 언제나 적자투성이인 것으로 보였고, 돌아가서의 막막한 삶이 미리부터 나를 겁먹게 했습니다. 게다가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 마음의 흔들림을 몸도 아는지 유난히도 자주 앓아야 했지요.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새로운 곳을 찾아 배낭을 꾸리고 푸는 모든 과정들이 무겁게 마음을 짓눌러 언제나 아침은 숙제를 마치지 못하고 학교로 가야하는 아이의 그것처럼 두렵기만 했습니다.

루앙남타에서 이인용 자전거에 올라타고 마을을 도는 존과 할아버지 뒤를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쫓아가고 있다.
루앙남타에서 이인용 자전거에 올라타고 마을을 도는 존과 할아버지 뒤를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쫓아가고 있다. ⓒ 김남희

루앙남타에서 오렌지색 승복을 입은 동자승들.
루앙남타에서 오렌지색 승복을 입은 동자승들. ⓒ 김남희
그래서인지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바라보는 풍경들이 빛바랜 사진 속의 그것처럼 희미하고 낯설었습니다. 마른 행주처럼 바싹 말라버린 마음은 퍼석거리기만 했고, 무엇을 보고 누구를 만나도 아무렇지 않아 가슴이 답답했지요.

그 시간 동안 '왜?' '언제부터?' 이렇게 메말랐는지에 대한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겨우 찾아낸 핑계거리 하나는 한 번 내 안의 것들을 모질게 태우고 난 후 아주 많은 것들이 소진되어버린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살면서 다시 그렇게 타오를 수는 없을 것 같아 문득 쓸쓸해지고는 했습니다. 작고 사소한 것들, 비루한 존재들, 낡고 허물어가는 것들에 머물던 시선은 여전한데 한번 얼어붙은 마음의 벽은 쉽사리 녹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넉 달을 보내고 라오스로 들어왔습니다. 육로로 국경을 넘어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와 태국 사이에 끼인 내륙 국가에 들어섰을 때, 이 작고 가난한 나라는 빠르게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와 앉기 시작했습니다.

돈 버는 일에 있어서 그토록 그악스럽던 중국사람들 틈에서 넉 달을 머문 후 라오스로 들어섰을 때의 그 생경함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마을을 돌아보노라면 벌거벗고 멱을 감던 아이들이 수줍게 웃으며 "사바디(안녕)" 인사를 건네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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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남타에서 자전거를 개조한 수레에 찐빵과 만두를 싣고 팔러 다니는 아저씨.(왼쪽) / 루앙남타 길에서 바나나를 구워 파는 아주머니.
루앙남타에서 자전거를 개조한 수레에 찐빵과 만두를 싣고 팔러 다니는 아저씨.(왼쪽) / 루앙남타 길에서 바나나를 구워 파는 아주머니. ⓒ 김남희
강을 낀 작은 마을들은 담도 대문도 없이 가난한 살림을 너나들이로 나누며 살고, 저녁 나절이면 겨우 서너 시간씩 전기가 들어오는 마을이 태반인 나라. 전화도 없고, 마을에 한두 집뿐인 TV가 있는 집에서는 저녁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히고 앉아 태국산 드라마와 쇼를 보는 나라.

그 흔한 플라스틱 장난감도 하나 없이 고무줄 놀이와 자치기를 하며 뛰노는 아이들 옆에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구경만 해야 하는 또 다른 아이들. 문맹률이 40%나 되고,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200불인 나라.

가난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나라는 닫힌 제 마음을 조금씩 열어주고, 따뜻한 피가 돌게끔 내 몸을 데워주었습니다. 화선지에 먹물이 번지듯, 그렇게 소란스럽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제 마음이 풀어지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제야 쉽게 돌아갈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음을 생생하게 깨닫습니다.

"나, 돌아가면 안 될까?"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아픈 몸을 견디던 날들에 친구에게 부렸던 투정.

"너는 세상에 선전포고를 하고 길을 떠났어. 자꾸 뒤돌아보면 안 돼."

파파야를 썰고 있는 어린 소녀의 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파파야를 썰고 있는 어린 소녀의 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 김남희
그 편지를 받고 조금 울었던 것도 같습니다. 이제 나이가 든 만큼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이 예전보다 조금 더 필요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아직도 마음은 조심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들에도 스물몇 살의 시절들처럼 쉽사리 달아오르지 않습니다.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카롭게 날이 서 있던 지난 날들도 부끄럽지만 무디어진 칼 역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저 이제는 사람에게 위로 받기보다는 말없는 자연의 손길에 기대고 싶어지는 나이에 들어섰음을 조금은 서글픈 마음으로 확인할 뿐입니다.

이제야 조금씩 사물들이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몸도 마음도 느릿느릿 회복되고 있음을 라오스에 와서야 느낍니다. 다음 편지를 드릴 때쯤에는 아마도 한결 여유로운 마음이리라 미리 기대어봅니다.

천지간에 다투듯 꽃 피던 짧은 봄날도 꽃잎처럼 바스라져가고, 서울은 이내 장맛비가 내리겠지요. 머무는 모든 자리에 신의 마음이 깃들기를 멀리서 기원합니다.

라오스의 대표적 이동수단인 "쏭태우" 트럭의 크기에 따라 수송 가능한 짐과 사람의 수가 달라진다.
라오스의 대표적 이동수단인 "쏭태우" 트럭의 크기에 따라 수송 가능한 짐과 사람의 수가 달라진다. ⓒ 김남희

무더위를 피해 언덕에서 돗자리를 깔고 경전을 암송하고 있는 동자승들.
무더위를 피해 언덕에서 돗자리를 깔고 경전을 암송하고 있는 동자승들. ⓒ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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