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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은 1910년 유하현 삼원포에서 창설된‘신흥강습소’였다.

그 후, 망명지사들이 합니하로 이전하여 경학사에 이어 이곳을 제2의 독립운동 기지로 삼으면서 신흥강습소를‘신흥학교’로 개칭하고, 교직원과 학생들이 삽과 괭이로 험준한 고원을 평지로 만들어 1913년 5월에 교사(校舍)를 낙성했다.

▲ 합니하의 신흥무관학교 옛 터
ⓒ 안천(서울교대)
신흥학교는 초대 교장 여준, 교감 윤기섭, 학감 이광조, 교사 이규봉·서웅, 군사 교관 김창환·성준용·이극 등이 맡았다. 이어서 교장 이세영, 교감 이상룡, 재무감독 이동녕이 임명되어 학교를 운영했다.

학교 이름을‘신흥(新興)’이라 한 것은 신민회의‘신(新)’ 자와 구국 투쟁이 흥기(興起)하라는 의미를 살린‘흥(興)’ 자를 붙인 것이었다.

학교 이름에서조차 굳이 신민회의‘신’ 자를 강조한 것은 해외 독립운동 기지 설치와 인재 양성 기관 창설 계획이 모두 신민회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흥학교는 신민회의 해외 독립운동 기지화로 탄생한 학교였다.

신흥학교에는 본과와 특별과를 두었는데 본과는 4년제의 중학과정이었으며, 특별과는 3개월 또는 6개월 기간의 무관 양성을 위한 속성과였다.

본과에서는 일반 중학 과정에, 무관 교육을 겸하는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당시 교육에 대하여 본과 3기 입학생으로 생도반장을 지내고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원병상씨는 <신흥무관학교>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고산자의 신흥무관학교 옛 터. 교사는 옥수수 밭으로, 연병장은 벼논으로 변했다.
ⓒ 박도
새벽 6시, 기상나팔 소리에 학생들은 일제히 일어나 내무반을 정리한 다음 복장을 갖추고 각반을 차고서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인원 점호를 하고 보건체조를 한다.

눈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혹한에도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은 풀 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체조가 끝나면 청소와 세면, 이어서 식사시간이었다. 주식은 열에 뜨고 좀먹은 좁쌀이라 솥뚜껑을 열면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열악한 환경이지만 교직원들은 보수도 없이 오직 열정으로 생도들을 가르쳤다. 생도들도 주린 배를 졸라매고 매일 맹훈련을 계속했다.

여기에는 영예도 공명도, 불평 불만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희생정신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일념뿐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집합나팔 소리에 조례가 시작되었다.

애국가와 교가를 앞산 뒷산이 마주 울리도록 우렁차게 부르고 나면 여준 교장 선생이 단상에 올라서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망국의 한을 울부짖었다.

윤기섭 교감은 생도를 지도함에 “만일 누가 한쪽 눈이 없는 단점이 있다면 그 사람을 지적해 말할 때. 한쪽 눈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장점을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교장을 비롯한 모든 교직원들의 언행은 다만 애국 일념에서 나온 것으로 그때의 감명은 내 마음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신흥학교는 설립 당시 원대한 포부와는 달리 큰 흉작으로 재정난에 봉착하여 어렵게 운영되었다.

▲ 등사판으로 발행한 <신흥학우보>
그래서 둔전제(屯田制 : 군사를 주둔·정착시켜 평시에는 농사를 짓게 하며 군사를 훈련함)를 도입하여 생도들은 농사나 땔나무는 직접 충당하였으며, 품팔이까지 하면서 학교의 재정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런 중에 1919년 3월 1일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졌던 독립 만세의 함성이 일제의 무력 앞에 꺾이게 되자, 항일 무장에 의한 독립 투지가 들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이 무렵, 일본 육사 출신으로 현대적 군사 이론을 갖춘 백산 이청천과 김광서 선생이 최신 병서와 군용지도를 지니고 신흥학교를 찾았다. 이들의 가담은 독립운동 진영에 백만 원군으로 감명을 주었으며 신흥학교 지원자도 날로 증가하였다.

서로군정서에서는 마침내 1919년 5월 3일(음력)에 정식 신흥무관학교로 개편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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