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세월 무상, 의로운 대한 남아가 동경했던 신흥무관학교 옛 터가 옥수수 밭으로 변했다.
ⓒ 박도
고산자

간밤에 우리 일행은 이른 아침, 더위도 피하고 차들도 없는 거리를 쾌적하게 달리고자 아침 5시에 출발하기로 약속했다. 세면장에 갔으나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6시 이후에 나온다고 했다.

반석은 내륙 한 가운데라서 물이 귀해 제한 급수를 하나 보다. 궁하면 통한다고, 마침 보온병에 찻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걸로 이를 닦고 남은 물로 수건을 적셔서 고양이처럼 얼굴만 문질렀다.

▲ 신흥무관학교를 찾기 위해 들른 고산자 인민정부
ⓒ 박도
5시 정각. 독립운동가 산실이었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옛 터가 있는 유하현 고산자(孤山子)로 가기 위해 반석을 출발했다.

반석 시가지를 벗어나자 그렇게 상큼할 수 없었다. 막 동산을 오르는 태양, 온통 녹음으로 싱그러운 도로 언저리의 풍경, 신선한 아침 공기, 거기다 도로는 온통 텅 비어 있었다.

교통이 원활했던 탓으로 예정보다 일찍 유하현 고산자 인민정부 청사에 이르렀다. 거기서 안내를 받아 전승향(全勝鄕) 대두자(大肚子) 마을을 비교적 쉽게 찾았다. 그때 시간이 7시 10분이었다.

▲ 신흥무관학교 옛 터를 현재 경작하고 있다는 원금석 노인 (오른쪽에서 두번째)
ⓒ 박도
먼저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 산책을 하고 있는 노인에게 이 마을에 원금석이란 분이 아직도 살아 계시냐고 묻자, 흰 이빨을 드러내며 빙그레 웃으면서 바로 당신이라고 했다.

8년 전에 강용권 선생이 답사할 때 안내했던 원 노인을 너무 쉽게 만나게 되어 기분이 매우 좋았다. 원금석(71) 옹은 목발을 짚고 다녔다. 유적지 안내를 부탁드리자 흔쾌히 들어주었다.

먼저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인 전승향 조선족 소학교로 갔다. 여름방학 중이라 학교 교무실과 교실은 텅 비어 있었고 운동장 한 쪽에서 노인 대여섯 분이 게이트볼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운동장으로 들어가자 노인 한 분이 다가오면서 인사를 청하였다. 당신은 평북 선천 출신의 김성봉(63)으로 이 학교 교원이라고 했다.

▲ 전승향 조선족 소학교
ⓒ 박도
이 학교는 자그마한 시골 학교로 전교생이 100명 남짓했다. 전승향 마을 주민 중에는 조선족이 절반 정도인 70가구 600여 명 거주한 바, 이 대두자 마을에는 20여 가구가 산다고 했다.

김 선생은 만리 길을 찾아온 고국의 손님을 교무실로 안내하려 했지만, 사양을 하고 원금석 노인을 뒤따라 신흥무관학교 옛 터로 갔다.

신흥무관학교의 옛 터는 마을에서 200여m 떨어진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옥수수 밭이었다.

10년 전만 해도 옛 터에는 건물의 기둥과 서까래가 풍우에 썩은 채 남아 있었지만, 옥수수 밭으로 개간된 후로는 그마저 다 없어졌다고 원 노인은 그간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그 새 신흥무관학교가 옥수수 밭으로 변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말함인가 보다.

▲ 옥수수 밭이 된 신흥무관학교 옛 터를 가리키는 원금석 노인
ⓒ 박도
지금은 그나마 당시의 유적지를 증언해 줄 노인이나마 생존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이분들도 돌아가신다면 신흥무관학교는 전설로만 전해질 뿐이리라.

옥수수 밭에 올라갔으나 한 길이 넘은 옥수숫대만 빽빽할 뿐이었다. 당시 뜻 있는 조선 젊은이의 선망이었던 신흥무관학교의 형체는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찾을 수 없었다.

동행한 이 선생은 당신 아버지 모교인지라 옥수수 밭고랑을 헤치면서 선친의 남은 체취라도 맡을 양인지 이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한국 정부나 관계 당국에서는 밥그릇 싸움, 말로만 애국하지 말고, 중국정부와 협조하여 여기에다가 ‘신흥무관학교 옛 터’라는 표지석이라도 제대로 세워서 훗날 자랑스런 조상의 유적을 답사하려는 역사학도가 이곳을 찾았을 때 황당치 않게 했으면 좋겠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