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어 통역 자원봉사자 송길자씨
영어 통역 자원봉사자 송길자씨 ⓒ 김병희
송길자씨의 모습 어디에도 그녀의 나이 예순은 없다. 생기 넘치는 표정과 재미난 말솜씨, 그녀는 영어 통역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송길자씨가 군산YMCA와 인연을 맺은건 합창단 활동을 하고 부터이다. 합창단이 해산되고 새로 만들어지는 영어회화반에 들어갔던게 8년 동안 그녀를 통역자원봉사자로 붙잡게 된 이유가 되었다.

당시 영어회화반 회원들이 모두 젊은이들이라 담당 간사에게 절대 분위기 안 흐릴테니 들어가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단다. 젊은 회원들은 들고나기가 일쑤여서 반 도우미 역할을 하는 '지기'가 되었다는 송길자씨는 영어회화반 자원봉사활동을 나오는 외국인 선생님을 '관리' 하는 일을 맡게 된다.

영어회화반 선생님들은 대부분 군인이었는데 선생님이 못 나오시는 날에는 송길자씨가 직접자료를 만들어 아이들을 지도하기도 했단다. 또한 한국 전통문화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외국인 선생님을 위해 절이나, 식당, 찻집 등을 소개하는 민간외교활동도 함께 했는데 이런 일 들이 그녀가 맡은 '지기'의 역할이었다.

외국인조차 인정했다는 송길자씨의 영어실력은 그녀의 처녀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 때문에 스물여섯에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는 그녀는 유난히 주관이 뚜렷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당시 청강생들도 많았다는데 송길자씨는 철저하게 나이를 속이고 열살아래 아이들과 나란히 수업을 받으며 늘 상위권을 유지했었다고 회상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여군이 되려고 했다는 그녀는 몸무게 미달로 꿈을 포기하게 되었고 대신 외국인 상사에서 근무하면서 쌓아 졌다는 영어실력은 조선호텔 입사로 이어졌다. 입사 4개월만에 노사분규가 일어나 분규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아쉬운 직장을 접어야 했던 송길자씨는 당시를 가장 아쉬웠던 때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무역회사에 스카웃이 되는등 영어실력을 인정 받았었다는 그녀는 결혼과 함께 사회생활을 접게 되었다.

영어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건 남편과 사별한 후부터다. 7년전 남편의 부재로 인한 슬픔을 잊기 위해 뭔가에 열중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옛 기억을 더듬으며 영어책을 다시 잡았다고 한다.

카톨릭 신자인 송길자씨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미사를 보는 익산의 한 성당에서 매주 미사 통역을 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20대여서 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월드컵 티셔츠에 힙합바지도 마다하지 않는 노력을 하고 있단다.

얼마전 회갑 기념으로 이들에게 '한턱 쐈다' 는 송길자씨는 'sixty'대신 'sixteen'이라고 불리는 기분좋은 선물을 받기도 했다.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미사 시간에만 그치지 않는다. 각종 이벤트때마다 늘 입이 돼주어야 하니 그녀의 일주일은 매우 바쁘게 돌아간다.

영어회화반과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한 통역 자원봉사 활동으로 일주일의 반을 보내고 있다는 송길자씨는 매일 아침 피아노 연습에 열중이다. 성능은 그리 좋지 않지만 YMCA회관에 마련된 피아노로 독습을 하고 있다는데 노래연습 하기에는 피아노가 그만이라고 했다.

외국인노동자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준다는 그녀는 지난해 미국여행길에 흑인찬송가를 구해 오기도 했단다.

"어려운 점은 없으신가요?"
"영어회화반 아이들을 주말에 부대에 초청할때가 있는데 젊은 아이들은 분위기에 휩싸이기가 쉬워서 이를 콘트롤 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외국인 노동자들의 나이가 어려 행여 상처를 받고 다시 나오지 않을까봐 말 한마디 한마디도 신경써서 하고 있습니다."

송길자씨는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일이 무척 보람스럽다고 한다. 많은 나이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신뢰하고 어머니처럼 따르는 아이들을 볼때면 더욱 그렇단다.

8년 동안 영어회화반 지기를 한번도 게을리 한적이 없다는 송길자씨. 1년전부터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멋쟁이 어머니 역할까지 그녀의 열정은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본보기가 되고 있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