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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어천가와 냄비근성 사이...불과 한달 반 전 노 대통령을 극찬했던 도올 김용옥은 6월 3일 정 반대로 "대통령됨을 거부하는 짓만을 골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문화일보 PDF
지난주 도올 김용옥은 <문화일보> 지면을 통해 "노 대통령, 당신은 통치를 포기하려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도올은 노 대통령을 향해 "그대는 애써 대통령됨을 거부하는 짓만을 골라하고 있다"며 "깊게 뉘우치고 대통령이 무엇인가를 하루속히 배워야 한다"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에 청와대가 발끈했다. <청와대 브리핑>은 "최소한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라고 도올을 비난하며 "한국의 대표 석학을 자처해온 도올의 기사로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수준의 표현과 논리로 가득찼다"고 지적했다.

불과 두달전 단독회견의 감격에 젖어, "노무현은 대상(大象)의 인간이었고, 대도(大道)의 인간이었다"며 "시정잡배들의 쇄설에 괘념치 마시고 대상을 집(執)하는 성군(聖君)이 되시옵소서"라는 서신을 올렸던 도올이었다. 그런데 불과 두달 사이에 도올과 청와대는 극언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도올이 극과 극을 오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노 대통령이 그만큼 잘못한 것일까.

어찌되었든 슬픈 광경이다. 16대 대통령선거 결과를 전하며 "노무현의 승리는 민중의 기적"이라고 감격했던 도올이 불과 두달만에 노 대통령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글을 쓰게된 현실은 일단은 불행한 일이다.

노 대통령이 기대만큼 제대로 국정을 운영해주었더라면 이같은 광경이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올에게도 책임은 따른다. 두달도 되지 않는 시간 사이에 어떻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갈 수 있는 것일까. 도올이 사람을 잘못본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변해버린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든간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극과 극을 오가는 평가에 도올의 글을 읽는 독자들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기서 도올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무 쉽게 달았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착각

애당초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했다면 그같은 기대 자체가 착각이었다. 이미 우리 사회는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한 사람에 따라 변화의 폭이 결정적으로 좌우될 정도로 단순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잡할대로 복잡해지고 다원화된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의 폭은 기대처럼 그리 넓지 못하다. 더구나 소수여당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까지 안고 출발한 경우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변화를 추구하는 대통령일수록 현실과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충돌과 딜레마에 직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사회의 구조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드러낸 한계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미 예정되어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애당초 노 대통령에게 '대도(大道)의 인간'이거나 '대상을 집(執)하는 성군(聖君)'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그 역시 현실속에서 정치를 해왔던 사람이고, 현실속에서 국가를 경영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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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에도 책임이 따르듯이, 지지에도 책임은 따르는 법이다. 불과 두세달 사이에 변했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도 문제는 있겠지만, 그 짧은 시간에 같은 사람에 대해 극과 극의 평가를 내리는 모습도 어쩐지 미덥지는 못하다.

물론 노무현 정부의 지난 100여일이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일관성의 부재, 국정운영의 미숙같은 요인에 기인하는 바가 커보이고, 아직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는 큰 방향 자체의 순수성이 의심받아야 할 상황은 아닌 듯하다.

눈앞의 상황에 실망하여 혹은 격분하여 등을 돌리는 것은 쉽지만, 정작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 정치사회에서 변화의 흐름을 어떻게 중단없이 이어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같은 큰 흐름 속에서 생각할 때, 노무현 정부가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전후좌우가 어찌되었든간에, 지금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변화와 개혁의 실패 내지는 실종으로 귀결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같은 바람을 표현하는 방식이 '노비어천가'를 부르는 식으로 이루어질 일은 아니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오류와 혼란들에 눈감고, 그저 "성공하기 바란다"는 식의 립서비스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대와 실망이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말하고, 노무현 정부는 고언(苦言)에 귀기울이는 노력을 기울여야 지금의 어려움은 다소나마 완화될 수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100일을 맞아 지난 6월 2일 특별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중요한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정치사회의 변화 흐름

근래 들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글을 쓸 때마다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어떤 지점에 서서, 어떤 태도를 취하며 글을 써야 하는가를 판단하기가 쉽지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금 노무현 정부가 서있는 지점이 복잡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나 언제 생각해도 해답은 '긴장'이다. 노 대통령 자신이 언론과의 '긴장'이 필요함을 말했지만, 애정과 기대의 끈을 유지하면서도 잘못에 대해 눈감고 지나가지 않는 생산적인 긴장이야말로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상생의 길이 아닐까.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이런 어려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도록 노 대통령이 잘해주는 일이다. 노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한 <이기명선생님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요즘 선생님을 생각하면 죄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다.……선생님의 고초를 생각하면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마음을 전했다.

물론 이 편지가 적절한 지에 대한 논란도 많지만, 정치적 판단을 떠나 자신을 사심없이 도왔던 사람에 대한 보은(報恩)을 간직하고 있는 진솔한 마음만큼은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한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선생님의 고초' 이전에, '국민들의 걱정'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대통령의 모습을 바라는 국민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국민들 앞에서 종종 자신의 억울함과 분한 감정을 토로하기에 앞서, 국민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모습이 필요한 것 아닐까.

일부 언론을 향한 노 대통령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문화일보>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용인 땅 거래의혹에 대한 노 대통령의 해명에 대해 '충분하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의 32.4%에 그친 반면에 '불충분하다'고 응답한 사람은 51.9%에 달했다고 한다. 사적인 서신을 통한 개인적인 감정표출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공적인 영역에서 공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노 대통령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의혹의 쟁점들은 남아있다. <조선>이나 <동아>뿐 아니라 <한겨레>에서도 의혹해명을 촉구하고 있는 그 내용들을 여기서 일일이 재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모든 것을 의혹으로 몰고가는 일부 언론의 모습에 대한 노 대통령의 분한 감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분노를 드러내기에 앞서, 청와대가 어째서 제기된 의혹에 대한 충분하고도 납득할만한 해명을 속시원히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않는다. 이 나라 최고의 정보력을 갖고 있고, 수많은 손발을 거느리고 있는 청와대가 아닌가. 그런 청와대가 어째서 의혹들을 속수무책으로 방치하여 국민의 불신을 키우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국민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달라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이다. 노 대통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불충분하다고 답한다면 좀더 적극적이고 책임있는 해명이 있어야 한다. 노 대통령의 결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문제가 단순하지는 않은 상태이다.

노 대통령의 진심이 무엇이든간에, 국민들 눈에는 노무현 정부의 도덕성과 직결된 문제로 비쳐지고 있는 문제이다. 일본에서 돌아온 노 대통령, 인터넷 편지에 담긴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번 냉정하게 해법을 생각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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