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종철이를 살려내라. 박용수 찍음
종철이를 살려내라. 박용수 찍음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
(김남주 詩. 자유)


이한열. 이 한장의 사진. 정태원 찍음
이한열. 이 한장의 사진. 정태원 찍음
지금부터 십육 년 전 정선(旌善)에서 목회하던 시절, 나는 경찰관들에 의해 집이 포위되어 꼼짝없이 갇혀 있었습니다. 도무지 그 울분을 삭일 수가 없어 씩씩거리고 있었습니다.

그해 1월 ‘박종철’이라는 서울대 학생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찰과 검찰에서 그 사건을 조작 은폐하여, 수배학생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박종철군을 심문하다 책상을 ‘탁’하고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그 발표를 믿지 않고 있었는데, 다행히 박종철군의 시신 부검에 참여한 의사 중 한 사람이 양심선언을 했었지요. 그래서 결국 박군은 물고문에 의해 죽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 사건을 지켜보면서, 도저히 내 양심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때 마침 내 주변에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기투합(意氣投合), 우리는 목회자로서, 강단에서 진리를 선포하는 사람들로서 가만있을 수 없으니 박종철군을 위한 추모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또 집회 날짜까지 다 정하고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계신 김동완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기로 하고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집회 일자를 며칠 앞두고 정선지방 교역자 회의가 있어 참석했는데, 감리사님이 우리를 불러내 하는 말씀이,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그런 집회를 하냐?’고 하면서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밖에는 경찰 지프차가 눈에 띠였습니다. 이미 경찰에서는 전화도청을 하고 있었고, 그 집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일일이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형사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드디어 박종철군 추모예배를 사북에 있는 어느 장로교회에서 드렸습니다.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는 결코 숫자로 계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6월항쟁 명동성당 농성. 박용수 찍음
6월항쟁 명동성당 농성. 박용수 찍음
그로부터 계속해서 군사정권 퇴진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그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나는 글을 좀 쓴다는 이유로 각종 집회의 성명서를 써주는 일을 맡았습니다. 어느 때는 강원도 원주까지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또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인 거리에서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그 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문을 조금 인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6월 어느 날, 갑자기 주택에 형사들이 들이닥치더니 집을 에워싸고 문 밖 출입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군청 공무원까지 동원되어 나의 동태를 감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악선전을 해댔습니다. ‘박 전도사는 사상이 불온한 사람이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선교탄압이라고 생각하여 전화로 항의를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주일날 교회에 나온 아이들까지 나를 이상하게 보고 피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렇게 일주일동안을 꼼짝 못하게 하고 감금 생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나중 안 일이지만 내무부와 안기부에서 그런 지시를 일선 경찰서와 행정기관에 내렸고, 그들은 그 명령대로 했을 뿐이었습니다.

연금에서 해제가 되고 그 다음날 아침,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전속력을 다해 달려 정선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경찰서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경찰서 직원의 제지도 뿌리치고 경찰서장실을 들이닥쳤습니다. 나는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서장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 이렇게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느냐? 무슨 근거로 내가 사상이 불온하다는 말을 퍼뜨렸느냐? 당신들이 일주일 내내 우리 집을 포위해서 꼼짝 못하게 가두어 두었는데, 지금 이 일로 해서 나는 목회도 할 수 없다. 이것은 분명 선교탄압이니 거기에 따른 적절한 공개사과를 하지 않으면 나는 서장실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는 지금부터 서장실에서 단식농성을 할 것이다.”

6.29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6.29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그렇게 한참동안 버티다가 경찰서장이 내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읍장과 경찰서 정보과장이 우리 집을 방문하여 일차 사과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이장 집 마당에 동네 전 주민들을 모아놓고 공개사과를 했습니다. 읍장과 정보과장은 내게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덕송리 주민 여러분, 박 전도사님은 훌륭한 애국자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애국자를 본의 아니게 상부의 지시에 의해 불편을 끼쳐드린 점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또 주민 여러분께도 많은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널리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나는 정선경찰서 서장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적인 자리에서도 나를 전도사라고 부르지 않고 꼭 목사님이 하고 불렀습니다. 내가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해도 또 그렇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용기 있는 젊은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셨을 것이고 그 후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얘기가 처음 제가 생각했던 방향에서 많이 빗나갔습니다. 그로부터 17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군사정권시절이나 소위 참여정부라는 지금이나 말만 많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합니다. 한 때 나는 운동권 목사라는 딱지가 붙어 많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나는 그 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그렇다면 운동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신 것도 따지고 보면, 당시 기성질서, 로마정부와 제도권에 밉게 보여 ‘정치범’으로 낙인이 찍혀 처형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느님이 주신 양심에 따라 살아가고자 합니다.

하느님이 목사로 나를 부르셨지만, 나는 내가 섬기는 교우들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억울하게 고난당하고 신음하는 강도 만난 모든 사람들, 그들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겠습니다.

6월항쟁. 최루탄을 쏘지 마라. 고명진 찍음
6월항쟁. 최루탄을 쏘지 마라. 고명진 찍음
보리를 먹게 된다는 망종(亡種)이 지났습니다. 한 여름 꼭대기입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교회당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개망초 꽃이 함초롬 피었습니다. 이맘 때 피는 들꽃이지요. 6.10항쟁 16주년을 맞으며, 이 민족의 평화를 위해서 싸우다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 앞에 나는 개망초 꽃 한 다발을 바칩니다.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