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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와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
ⓒ 박도
조선족 이주사

지금은 우리 조선족이 중국 땅에서 소수 민족으로 그들 인민으로 당당히 대우받으며 살고 있고, 또 연변 일대는 연변조선족 자치주로 설정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우리 조선족의 중국 대륙 이주사(移住史)는 핏빛으로 얼룩졌다.

조선족 이주 시기를 크게 제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주로 19세기 중엽부터 19세기말까지로 그때의 이주는 주로 흉작에 따른 가난과 탐관오리들의 폭정 때문이었다.

제2기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부터 1920년대까지로 주로 항일운동을 위한 정치적 망명이었다.

제3기는 그 이후부터 일제 패망 때까지로 일제의 환위 이민 정책(換位移民政策 : 일제가 강점한 이래 일본인을 조선으로, 조선인을 중국 동북으로 이주 보낸 정책)에 따른 강제 이주 정책 때문이었다.

〈제1기〉
10세기 초까지는 만주지방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이기도 했다.

명(明)나라 말엽까지는 국경문제로 중국과 분쟁을 일으킨 일은 별로 없었으나, 명나라가 망하고 청(淸) 나라가 들어선 후, 봉금정책(封禁政策 : 청조 통치자들이 자기들의 발상지라고 여기는 백두산 일대를 보호하며 동북지방에서 나는 특산물을 독점하고 나아가서 만족(滿族)의 풍속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실시한 정책임. 원래는 한족들이 동북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자는 것이었으나 후일 조선족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오는 것을 막았음)을 써서 조선족의 이주를 엄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 중국 관리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몰래 건넜던 압록강
ⓒ 박도
하지만 이 일대는 조선의 변경 거주자들이 몰래 국경을 넘어 인삼을 재배하고 수렵과 벌목을 하여 생업을 이어갔던 터전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생계를 위하여 청의 봉금을 무릅쓰고 도강(渡江)을 계속했다.

조선후기로 접어든 후, 삼정(三政) 문란과 탐관오리들의 대민 수탈이 거듭되자 백성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남부여대로 북상 도강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19세기 중엽(1869~1870)에는 우리나라 서북 지방에 극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자 굶주리다 못한 수많은 백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간도와 연해주 일대로 이주했다.

이들은 청의 관헌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받다가 다행히 1880년대에 이르러 청 조정에서 간도개척을 위하여 조선족 이주를 포용하는 정책으로 바뀌자 간도지방에 조선족 마을이 늘어났다.

〈제2기〉
일제의 한국 식민이 노골화되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부터 1919년 기미만세운동 전후까지 기간으로 국내에서 활동하던 항일 의병·독립지사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새로운 활동 방향과 근거지를 찾아 나섰다.

초기의 인물들로는 홍범도, 차도선(車道善), 이진용(李鎭龍), 조맹선(趙孟善), 유인석(柳麟錫), 이범윤(李範允) 등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빛나는 공훈을 남겼다.

▲ 압록강과 함께 또 하나의 국경으로, 우리 겨레의 눈물이 숱하게 뿌려진 두만강 푸른 물
ⓒ 박도
1910년 한일합방 전후에는 이상설, 이동녕, 이시영(李始榮), 안창호(安昌浩), 박용만(朴容萬), 박은식, 신채호(申采浩), 이상룡, 여준(呂準) 등으로 이분들은 집단적으로 이주 계획을 세워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이를 거점으로 삼아 장기적인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또한 이 무렵에 대종교(大倧敎 :우리나라 고유의 종교로 단군을 모심) 계열의 민족 지사들도 대거 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 항일전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인 바, 대종교 창시자 나철(羅喆)을 비롯하여 서일(徐一)·박찬익(朴贊翊)·백순(白純) 등이다.

이분들은 동북 일대에 조선족학교를 세워서 특히 민족주의 교육에 힘썼다.

〈제3기〉
일제는 1910년 한일 합방 후, 1919년까지 10년 간 ‘토지조사’라는 명목으로 문서에 없는 땅은 몰수하고, 임자 있는 땅은 헐값에 사들여 동양척식회사, 농업척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인을 조선에 이주시켜 그들을 지주로 만들었다.

▲ 초기 이주민들이 벼농사를 짓기 위해 만주 벌판에다 논을 만들었다.
또한 일제의 악랄한 경제 정책으로 토지를 빼앗긴 우리 농민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괴나리봇짐에 쪽박을 차고 북상 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27년에서 1931년 사이의 통계에 따르면, 일제는 해마다 백미 660여만 석을 본국으로 수탈해 갔다는데, 당시 생산량의 42퍼센트를 차지했다. 그 무렵 신문 보도다.

강원도 이천군(伊川郡)에서는 근년에 와서는 화전조차 마음대로 경작 못하고 각종 세금은 나날이 늘어가며 가지가지 부담액은 많아서 돈 있는 사람은 돈 없어지기 전에, 돈 없는 사람은 춘궁기는 닥쳐오고 나날이 쪼들리는 생활은 점점 심하여져서 가다가 죽더라도 북간도에 간다고 떠난 동포 수가 올 봄에 벌써 150여 명에 달한다는데 지금도 가려고 준비하는 가구가 50여 호라는 바, 길거리에는 빈집이 많이 있다더라. (동아일보 1927. 4. 2)

▲ 항일 무장 독립군들
일제는 만주사변 후 부일(附日) 조선인에게 이른바, ‘만주 치안’이란 이름으로 집단 이주를 시켰다. 이들은 헌병 보조원, 밀정, 군관학교 지원자들이다. 일제는 이들과 독립군과 싸우게 하는 교활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의 이주책이었다.

그런 중,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 물자, 주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만주 일대에 농지 조성계획을 실시하면서 ‘개척 이민단’이라는 이름으로, 서만 지역에 우리 동포를 더욱 대규모로 내몰았다.

이렇게 가난으로, 정치적 망명으로, 일제의 정책으로 이주한 조선족들은 1945년 광복 직전까지 215만 명에 이를 정도로 국외 최대의 동포 사회를 이루었다.

이들 대부분은 중국 동삼성 전역에 널리 거주하고 있지만, 아직도 고국이 그리운 양, 국경에서 가까운 룡정,연길 일대에 가장 많이 몰려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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