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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키가 자라 중학교에 가게 되었다.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자 한번은 더 낫을 들고 오라 한다.

일년에 두 번 낫을 들고 가게 되는데, 한번은 여름 방학 때 진종일 풀 베는 일이었다. 정부 시책 '퇴비 증산'이 학교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러니 여름 방학 때마다 노력봉사 명목으로 불러대니 하는 수 없었다. 그래도 노동의 강도는 노는 거나 다름없지만 뙤약볕 아래서 하다보니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또 한번은 보리 벨 때다. 이 때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꺼이 간다. 그렇다고 1학년 때부터 그럴 수는 없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함부로 덤볐다가는 무슨 일 당할지 모르지 않은가?‘귀빵맹이’한 번 맞으면 하소연 할 데 없다. 그러니 1학년 때는 선배들 앞에 주눅 들고, 형 눈치 보느라 바빠 그냥 보리만 베는 게 상책이다.

그래도 아침에 아버지께서 “야, 이놈들아! 남의 것 빌라믄 집에서 자빠져 퍼 질러 잠이나 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노니 사춘기(思春期)는 누군들 절대 속일 수 없는가 보다.

중학생들이라고 다 보리를 베러 나간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살았던 전라도 중 무주, 진안, 장수에서는 2모작이 불가능한 곳이라 보리 베러 나갈 일이 없었고, 평야지대라 하더라도 논산을 넘어서면 힘들었다. 동쪽으로 대구 북쪽은 보리를 심어도 모내기가 늦으면 냉해에 가까운 현상 즉, 벼에 여물이 제대로 들지 않아 청초(靑草)질 우려가 높았으므로 보리를 심지 않으니 이런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초등학교 3년과 중학교 3년 동안 우리는 보리를 베러 다녔다. '교복자율화'의 첫 수혜자였던 우리는 1학년 1학기까지는 강제성이 있었으나 2학기 때부터는 자율에 맡겨졌다. 그 뒤로도 옷을 더 사기 힘든 애들은 사시사철 하의(下衣)는 청바지였고, 상의는 여름엔 하늘색 교복 셔츠를, 겨울엔 검정 동복을 입고 다녔다. 그 교복의 허물을 벗고 나자 나에겐 본격적인 사춘기가 도래한 것이다. 정확히 그 때쯤 보리를 베러 나갔다.

그 때 이미 형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없었다. 학년 별로 따로따로 갔는데 2학년이던 우리들은 첫날은 길성이라는 마을로, 둘째 날은 화순온천이 있는 동복댐 상류 쪽으로, 셋째 날은 백아산 휴양림이 있는 수리로 갔다. 학교로 갈 필요 없이 보리 베는 곳으로 직접가면 되었다.

이르게 도착한 버스는 우리를 내려주고 흙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화순 읍내 쪽으로 덜커덩덜커덩 도망을 갔다. 세 시간 걸려 광주공용터미널에 도착해야했으니 버스는 서둘러서 떠났다. 그 때부터 선생님과 다른 마을 쪽 아이들이 오는 걸 기다리며 하나 둘 씩 버스를 타고 도착함에 따라 그 동네를 쓸고 돌아다니며 여자 애들 쳐다보느라 넋을 잃었다.

한 학년이 여자 2반, 남자 2반. 총 네 반으로 240여명이었다. 여학생들은 미인대회 나온 것 마냥 이쁜 모자를 하나 씩 눌러 쓰고 나왔고, 겉멋만 든 뭔가 아는 남학생 놈들은 뒷주머니에 빗을 꽂고 나왔다. 머리에 바를 마땅한 것이 없던 때라 빗질을 수회 반복하면 머리에 윤기가 흐르고 웬만한 종이도 빨아들일 정도로 흡인력이 대단한 찰랑찰랑한 머릿결로 바뀌었다. 남자애들은 거무튀튀했지만 여자 애들은 뽀얀 살결을 자랑했다.

학교 수업시간이 되기 전에 보리 베기가 시작되었다. 넓지 않은 보리밭 곳곳과 논두렁에 장사진을 이룬 학생들은 한 반 60여명씩이 들어갈 때도 있었으니 '펄벅'의《대지》에 나오는 메뚜기 떼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초등학교 때 100여명 남짓 밖에 안 되는 그 인원을 전체 숫자로 압도하고 키로 대적할 수 없게 하고 일을 해 치우는 솜씨에서 감히 겨룰 수 없으니 눈 깜짝할 사이 한 마지기 꼿꼿이 서 있던 곡식을 발 아래로 뉘어버렸으니 말이다.

'산등성이 저 멀리 서서히 넘어오던 메뚜기 떼가 하늘을 가릴 듯 일제히 내려앉아 황금 들녘의 추수를 앞둔 알곡은 물론 줄기까지 삽시간에 먹어 치우곤 사라지는...' 그 광경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 논바닥엔 베어진 보리와 씨를 떨어뜨린 ‘독새기’가 키를 같이하고 ‘볼태기’가 듬성듬성 떠 있을 뿐이다.

쓰러진 보리는 아이들이 엄청 싫어했다. 그런 곳을 만나면 줄기를 낫으로 완전히 베지 않고 주변 가상만 몇 가닥 베어 그 위에 올려놓고 다 벤 것처럼 위장해 놓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서너 시가 넘은 시각에서 해 질 무렵까지에는 주인이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마저 베야 하는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숫돌 하나 제대로 챙겨오지 않고 낫도 갈아주지 않으니 아이들 심보를 건드리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몇 개 뽑히고 나면 “에라 모르겠다. 대충하지 뭐.” 하고는 심술을 부리니 아무도 이걸 막을 길 없었다.

순진한 논 주인은 다음날 학교로 전화를 해서 달랑 남은 당직 선생이나 서무실 직원에게 항의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점심때나 휴식 시간에는 일찌감치 밥을 먹고 여학생들 근처에 얼씬거리고 장난치는 아이들, 잘 보이려고 같은 동네 여자 아이 옆으로 다가가서 껌 한 통이나‘환타’,‘사이다’를 대신 건네주라며 접근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이 일하기 싫은 데다가 낫도 안 들어 날이 보리 줄기에 미끄러지면 손 베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소독하고 붉은 ‘아까쟁끼’를 바르고 연고 발라 붕대로 칭칭 감고 환자노릇 하니 선량한 학생들은 일 할 맛나지 않았다.

때가 때인지라 보리밭에서 도망을 해서 몇 몇 어울려 놀아버리는 아이들 때문에 선생님들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며 빠져나가는 걸 지켜본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여학생들의 화장실 문제였다. 작은 것은 남자애들은 아무데서나 방향 바꿔 보면 되었지만 여학생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보리밭에서 안 보이는 곳까지 가거나 동네로 가야만 했다.

사나흘을 그렇게 보리를 베고 나면 학생들의 얼굴은 보리 알맹이처럼 구릿빛으로 바뀌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버스 시각이 맞지 않아 다른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십여 리 걸어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해질 무렵 길가 가로수 아카시아 나무는 흐드러지게 흰 꽃을 피워 벌렁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게 했다. 산으로 이어지는 낮은 곳 양쪽으로 찔레꽃이 쫘악 깔려 피어 막 분을 바르기 시작한 여학생들 몸에서 나는 내음 같았다. 그 날은 몰래 훔쳐 마신 막걸리 몇 잔 걸친 것처럼 향기에 취하여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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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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