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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도 농사일은 누구나 했던 6, 70년대

학교 파하면 집에 와서 노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부모님이 시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놀아서 뭐하냐?’는 착한 마음에서였다. 일은 정말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할 일이 태산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제 못다 했던 일을 미리 짐작하고 찾아내는 것도 내 몫이었다.

꼴 베고, 염소 데리러 가고, 고사리 꺾으러 가고, 퇴비와 함께 논에 들어갈 풋나무 베러가고, 논밭 매러 가고, 지게 지고 나무하러 가고, ‘망웃짐’(퇴비짐) 지고 가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이태 전부터 만들어진 지게를 보면 알 만하지 않은가? 아버지께 '왜 내 지게는 안 만들어 주시느냐?'며 따진 기억이 분명하다.

그렇게 시작된 집안일-농사는 한도 끝도 없었다. 한 살 한 살 더 먹어감에 따라 그 강도도 세졌다. 그런 내 노동은 자초한 측면이 강했다. 키는 작은 꼬맹이였던 나는 집에 와서 공부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고서도 초중고를 통틀어 항상 상위권에 들었으니 어른들은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걸로 오해를 하신 건지 모른다.

일을 거부할 용기를 가진 나와 그걸 용인하셨던 부모님

그래도 나는 일에서만큼은 형편이 좋았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해서 그런지, 4남2녀 중 다섯 째이며 아들로는 막내여서 그런지 내 의견이 존중되었다. 내 스스로 일하지 않으려면 안 할 수 있는 권리를 당당히 주장해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이도 1년에 한 두 번에 지나지 않았다.

위로 11살, 8살, 5살, 2살 터울의 형제가 있었고, 아래로 5살 밑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동생은 어머니께서 살아 계신 4학년 때까지는 일이라는 건 모르고 살았던 철부지였다. 하지만 위로 4형제는 학교 다니는 게 절반을 조금 넘을 정도였다. 농번기 때는 아예 학교 가는 게 금지가 될 지경이었다.

이게 어디 우리 집만의 문제였던가? 내 또래 아이들은 더 심했다. 초등학교 때 절반을 학교에 나오지 않은 아이들이 3할은 되었다. 그러니 짝꿍 아이는 학교에 나오면 다 집으로 돌아간 시각에 언제나 한시간에서 두시간은 나에게 따로 개인교습을 받고서 이해를 하고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4학년 때 한글을 깨치지 못한 친구가 있었고 5학년이 되어서야 ‘구구단’을 왼 아이도 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나도 내일 선생님께 꾸지람 들을까봐 친구 공부를 끝내주지 않고서는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낫 들고 학교로 온 아이들, 오늘부터 3일 간은 보리베러 간다.

4학년이 되자 봄과 가을 두 차례 정기적으로 낫을 들고 등교했다. 벼 벨 때는 시늉만 하였지만 보리 벨 때는 진짜 일하러 나가야했다. 위험천만한 낫을 들고 4학년 짜리가 보리를 베러 간다하면 요즘에는 선생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이른 아침 학교 운동장과 교실 안은 낫으로 칼싸움 비슷하게 장난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관사와 개인 숙소에서 머물던 선생님은 바짝 긴장하고 아이들 통제하느라 정신 없다. 그나마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선생님이 시킨 대로 낫을 갈아 아버지들께서 새끼줄을 꼬아 칭칭 동여매 준 덕분이다. 그래도 일을 집에서 해본 가락이 다 있는 터라 낫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기 때문에 장난은 적당한 선에서 끝난다.

구령대 앞에 모여 소풍가듯 선생님의 훈화를 듣고 호루라기 입에 문 선생님을 졸졸 따라 3개 학년 3개반 총 100명 남짓의 거무잡잡한 학생들과 교감 선생님과 소사 아저씨까지 동행하여 보리를 베러 가는 풍경. 여린 학생들이 보리를 벨지 제 손이나 다리를 벨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 나서는 것 자체가 진풍경이다.

농촌 산골에 있는 학교다 보니 학교에서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나서는 길이었을 것이다. 사고나면 결국 선생님 책임인 것을. 군대에서 사격할 때 군기는 보통이 아니다. 엄격하다. 조금만 딴 짓, 허튼 수작을 하면 통제관으로부터 가해지는 체벌은 상상 이상이다. 보리 벨 때도 선생님이 기다란 지휘봉-매를 들고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5, 6학년 언니들은 잘 베었지만 우리 4학년은 장난치기 바빠...

“휘리릭~”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 반 서른 명 정도가 한 배미를 책임지고 베어나가기 시작한다. 장갑을 낀 아이, 서투르게 보리를 뽑는 아이, 어른 보다 다부지게 베어 가는 아이, 딴청부리는 아이, 처음 낫을 잡아봐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 제 맘대로 보리밭을 망나니처럼 돌아다니는 아이로 보리밭은 어린이 놀이터에 가깝다.

선생님께서 이내 불러 모으셨다.

“여러분, 선생님은 여러분들이 이 귀중한 곡식이 자라는 보리밭에서 그렇게 장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겠어요?”
“예~”
“만일 낫으로 장난하다 다치면 어떻게 되겠어요? 손 베면 큰 일 납니다.”
“선생님 자꾸 해섭이가 뽀짝거려서 일 못하게 해요?”
“해섭이 어린이 안 그럴 거지?”
“예, 선생님!”
“선생님은 여러분이 일을 많이 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선생님께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무 사고 없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알겠습니까?”
"예~~~”
“저기 5학년 6학년 언니, 형들 하는 것 좀 보세요? 멀찌감치 떨어져서 찬찬히 베잖습니까?”
“알겠어요 선생님.”

다시 보리를 베어 나갔다. 아이들을 위한 배려인지는 몰라도 쓰러진 논은 선정되지 않았으니 꼿꼿하고 베기 좋은 보리다. 아직 꾀를 부릴 나이가 아닌 4학년 학생들이라 보리 이삭 하나 구경하기 힘들다. 어떤 아이는 제법 솜씨가 있어 어느 정도 깍지가 만들어지면 주변에서 조금 떨어진 것도 “착!착!착!” 낫으로 철겨서 끌어 모아 어른들 흉내를 내서 한 번에 무더기를 만든다.

200평 한 배미에 들어간 6학년 선배들은 벌써 마치고 윗 논으로 옮겨갔다. 5학년 선배들도 거짐(거의) 다 마쳐 가는 분위기다. 가장 자그마한 (*)다랭이를 맡은 우리 학년은 끝내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 이 때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거들었다. 얼마 안 되어 4학년 아이들이 한 배미를 마치자 쉴 시간이 돌아왔다.

휴식 시간에 먹는 두 가지 빵과 사카린 녹인 물 한 그릇 더 먹겠다는 아이들

“휘익-”
“다들 그만하고 모여라.”

소사아저씨가 짐 실을 때 쓰는 ‘짐발이’ 자전거로 울퉁불퉁 두 번에 걸쳐 날라 온 소 없이 노란 콩 한 쪽 박혀있는 빵 한 개와 주인 아저씨가 주신 반달 빵 한 개씩을 나눠주었다. 널찍한 말무덤 언덕에 자리를 깔고 앉아 “어기적어기적” 두 개를 게 눈 감추듯 먹고 또 먹을 게 없나하며 두리번대며 빵 들어있던 박스로 다시 가보는 아이, 제 것 다 먹고 동무 옆으로 가서 “쬐끔만~” 하는 아이, 한 개는 먹고 한 개는 집에 있는 동생 주려고 호주머니에 푹 찔러 넣어두는 아이도 있다.

훌렁훌렁한 국만 먹고 자란 아이들이 물을 찾을 때가 되었다. 양은으로 된 양동이(철 바케스)에 가득 담긴 물에는 주인 아주머니가 꼬깃꼬깃 종이게 싸서 가져온 사카린 한 봉지를 나눠 타서 나뭇가지로 휘휘 저어 녹여둔 지가 오래되었다. 옹달샘에서 길러 온 물이 아직도 시원하다.

“한 그릇만 더 먹고요.”
“안 된당께~”
“글먼 쬐까만 더 주싯쇼~”

이런 아이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주변에 있던 티끌도 옷에 붙어 있던 까시락도 들어갔다. 논에서 묻혀온 흙이 들어가도 괜찮다. 하지만 그렇게 사정사정해도 두 번 먹기는 힘들었다. 그 달짝지근하고 시원한 물을 언제나 또 한 번 먹어보나. 6학년 때부터는 사카린의 부작용을 알았던 탓인지 맹물만 주었으니 보리 베는 재미도 사라졌다. 건빵으로 대체돼 학교 빵마저 안 나왔으니 무슨 낙(樂)으로 일을 하나?

초등학생들이 오후 6시까지 일을 해도 겨워하지 않았다. 몇 몇 아이는 자기네 논으로 가서 다시 낫을 갈아 마저 보리를 베어야 할 모양이다. 학교 파하자마자 논으로 오라는 엄마의 불호령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우린 3일에서 4일은 보리 베러 들로 나갔다. 그러고 나면 농번기 방학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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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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