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아시스>(감독 이창동). 막 출소한 종두(설경구)와 중증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문소리)의 사랑을 담은 영화로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특별 감독상과 신인여우상 등 2개 부문을 수상한 바 있다.
수상 경력이 말해 주듯 뛰어난 연기를 확인할 수 있었던 <오아시스>. 내용도 내용이지만 설경구가 문소리를 안고 춤을 추며 좋아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그 장소가 서울에 있기는 하지만 일반인은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서울 청계고가도로(이하 청계고가)가 그곳.
청계고가. 차를 타고 지나가거나 높은 빌딩에서 내려다 볼 수는 있어도 직접 발을 딛고 설 수는 없는 곳이 청계고가였다. 그런데 지난 25일(일) ‘Hi Seoul 페스티벌’ 행사의 일환으로 청계고가를 직접 밟을 수 있는 ‘시민걷기대회’가 있었는데, 청계고가의 동쪽 끝인 신답초등학교 앞에서 시작해 서쪽 끝인 보신각 근처까지 이어지는 코스였다.
이미 1937년에 시작된 청계천 복개
현재 왕복 4차선으로 하루 11만 대의 차량이 이용하는 청계고가는 아래의 청계천로와 함께 서울 도심 교통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청계고가와 청계천로가 있는 이 곳에는 개천이 흘렀다.
물론 지금도 도로 아래로 물이 흐르긴 하지만 그저 썩은 물에 불과하다. 그 시작은 언제일까? 이미 1918년부터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청계천과 특히 일본인이 많이 살던 남쪽 지류에 대한 준설작업을 하던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청계천 복개를 결심한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전쟁 상황 속에서 일제는 서울을 병참기지화 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신속한 물자 수송을 위해 서울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복개, 도로를 넓힐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전염병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어쨌든 일제는 1937년부터 1942년까지 광화문우체국 앞의 대광통교에서부터 영풍문고가 있는 광통교 인근까지 구간에 걸쳐 청계천을 복개한다. 한강을 비롯한 대다수 하천이 서쪽으로 흐르는 데 반해 동쪽으로 흐르던 청계천, 1910년대 청계천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후 처음으로 인간에 의해 세상의 빛으로부터 격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도 물러가고 한국전쟁도 끝나 어느 정도 잠잠하던 청계천은 이미 복개가 끝난 광통교 인근에서 동대문 오간수다리까지 2358.5m 구간이 복개되면서 다시금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1958년 5월 25일부터 1961년 12월까지의 일이다.
이후 박정희는 1965년 12월 들어 7.8km에 이르는 전 구간 복개를 완료한다. 이 같은 복개 공사를 통해 총 길이 3670m 최대 너비 84m에 이르는 청계천은 광교와 수표교, 오간수교, 영미교, 관수교 등 모두 24개의 다리와 함께 지하로 모습을 감추게 된다.
개천 위에 도로, 도로 위에 고가도로
그런데 청계천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복개된 도로 양쪽으로 상가가 밀집,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도심에서 외곽으로 빠지는 새 도로가 필요했다. 이에 아스팔트 도로를 뒤집어 쓴 청계천은 그 위에 또 하나의 도로를 덧쓰게 된 것이다. 바로 청계고가다.
청계고가는 1968년 마포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마포로를 고가를 이용해 통과할 수 있도록 길이 771m로 건설한 아현고가도로에 이어 두 번째 들어선 고가도로로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고속도로다.
도시고속도로? 이를 테면 시청이 있는 서울 도심에서 마장동까지 신호를 하나도 받지 않고 내달릴 수 있는 도로인데, 미국 영화에 자주 나오는 것처럼 차를 타고 고속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그리하여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지휘 아래 1967년 8월 15일 시작된 공사는 꼭 4년만인 1971년 8월 15일 완공을 본다. 청계고가는 너비가 16m에 이르고 길이 5.56km의 왕복 4차선 전용도로로서 고가 아래에 숨어 있는 청계천에서 1984년 11월 7일 그 이름을 따왔다.
한편 이 고가 주변에는 밀리오레나 세운상가를 비롯, 동대문시장과 평화시장 등 10여 개가 넘는 대규모 시장과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사라지는 ‘개발시대’의 증거
그러나 청계고가는 대대적인 보수를 받았어야 할 정도로 부실한 공사였다. 빠른 시일 내에 공사를 끝내야 한다는 명제 하에 일사분란하게 진행된 설계와 시멘트와 자갈을 1:2.4나 1:3.6 등으로 배합해 콘크리트를 만드는 등 주먹구구식으로 건설됐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주한미군은 미군들에게 이 도로를 이용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하지 않나.
그러나 오는 7월 1일부터 시작될 청계고가 철거 작업을 생각하면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맘이 든다. 청계천을 복원해 자연과 인간이 함께 숨쉬며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데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한달만 지나면 청계고가가 우리 눈 앞에서 영영 사라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한없는 아쉬움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당시 이 땅의 상징물로서 삼일빌딩과 함께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에는 반드시 실렸다는 청계고가. 그것이 사라지는 데 대한 인간적인 서운함 혹은 애정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청계고가에 대한 연민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역사를 담담하게 증언해주는 중요한 증거가 사라져가는 데 대한 아쉬움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청계고가는 삼일빌딩과 마주 서서 박정희의 개발시대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무조건 보존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 이것마저도 사라져 버리면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를 관통하며 사람들을 일터로 내몰았던 ‘개발시대’는 무엇을 보고 떠올릴 수 있을까?
청계고가를 철거하면서 10여 미터 정도는 마치 탑처럼 남겨두어 ‘이 자리에 청계고가가 있었노라’하고 증언하게 하자는 주장은 그저 아집에 불과한 것일까? 개발시대의 증거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주요 관광 자원으로 개발할 수도 있을 청계고가.
이제 청계고가는 한달이라는 시한부 인생만을 받아놓은 상태다. 이 밀려오는 아쉬움은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