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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책들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무엇보다 그가 가진 특유의 재치와 박식함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의 글에는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그는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쓴다. 대개의 '스타 지식인'들이 대중들의 지적 능력의 범위 밖에서 머물고 싶어하는 반면, 에코는 이들과 달리 학술지와 대중지의 독자층을 제대로 구분할 줄 안다. 무의미한 개념들을 이리 저리 남발하며 독자들의 머리를 혼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에코의 가장 큰 매력이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가장 쉽게 말한다"는 사실을 그만큼 분명히 보여주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두번째로 에코의 글이 독자, 그 중에서 특히 한국의 독자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작가와 독자를 묶는 경험의 공감대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성장한 작가의 경험담이 다른 반대편 문화권의 독자들의 무릎을 치게 만든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에코가 어린 시절 이탈리아에 진주했던 미군으로부터 얻은 만화책과 껌을 이야기하고 "무솔리니와 조국의 영광을 위해 몸을 바친다"는 제목으로 웅변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았던 순간을 이야기할 때 그는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이방의 작가가 아니다.

에코가 새로운 책으로 한국의 독자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묻지 맙시다>(김운찬 번역/열린책들)라는 다소 긴 제목의 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백여 쪽으로 그의 책 가운데 가장 얇은 두께지만 한국의 독자는 책장을 그리 가볍게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다섯 가지 주제- 전쟁, 파시즘, 신문, 타자, 관용 - 모두가 한국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에코는 첫번째 글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기'에서 전쟁과 이를 둘러싼 이해관계, 그리고 이에 대해 지식인이 수행해야 할 역할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 옳지 않다고 믿는 전쟁에 군대를 보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에 대한 변명이었다.

주권국가의 수도에 폭탄을 쏟아붓는 범죄에 가담하면서 "국익"을 말하는 정부, 그 행위를 합리화하기에 여념이 없는 언론, 그리고 학살의 전리품에 "이라크 효과"라는 경제용어를 붙여 계산기를 두드리기에 여념이 없는 지식인, 그리고 그 정부에 세금을 대는 국민들을 향해 에코는 말한다. 전쟁이 이익을 주는 경우야 말로 전쟁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이다. 에코는 전쟁에 대해 침묵하는 지식인과 참전을 종용하는 언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쟁의 불가능성을 선언하는 것은 지성의 의무입니다. 비록 다른 해결 방안이 없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중략) 지식인들이 전쟁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아마도 지식인들이 (전쟁이라는) 그 뜨거운 순간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매체 자체가 전쟁과 그 도구의 역할을 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디어를 중립지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p. 29) (번역서를 그대로 인용하되 편집상의 오류로 보이는 사소한 오역을 바로잡았음/필자주)

에코에 따르면 "극적인 뉴스들을 판매하는 것이 바로 뉴스산업의 논리"(p. 21)이기 때문에, 언론이 전쟁에 대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상업언론이 항상 정부를 향해 북한에 대해 '화끈'하고 '박력'있는 태도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뉴스란 소비자의 시선을 끌기 위한 상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뉴스가 상업 언론사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자의적으로 생산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언론을 '중립지역'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에코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순진한 옷을 입고 다시 등장하는 파시즘의 문제를 다룬 후, 또다시 언론의 문제로 돌아간다. 그러나 에코가 세 번째 글에서 주목하는 것은 언론 일반이 아니라 신문의 문제점이다. 에코가 외국, 특히 미국 선호증에 걸린 이탈리아 신문의 오류를 지적할 때 한국의 독자들은 이것이 비단 그 나라의 문제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뉴스와 논평을 분리하지 못하는 신문의 보도태도, 그리고 특정 이슈를 자의적으로 부각시키는 행태에 대한 에코의 비판에 와서는 이 책이 다른 나라에서 발행되었다는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에코는 말한다.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 Il Nuovo
"주간지화하기 위해 페이지 수를 늘리고, 페이지 수를 늘리기 위해 광고를 확보하려고 싸우고, 더 많은 광고를 싣기 위해 페이지 수를 더욱 늘리고 부록들을 고안해 내고, 그 페이지수들을 모두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하고, 또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무미건조한 뉴스(이미 텔레비전에서 보도한)를 넘어서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주간지화하고 또 뉴스를 발명해야 하며, 때로는 뉴스가 아닌 것을 뉴스로 만들기도 합니다." (p.77-78)

에코는 신문에게 더 이상 국회의사당에 갇혀있지 말고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에코는 이탈리아의 신문이 정치기사와 공연안내에 지면을 할애하기 위해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간과해왔다고 비판한다. 여의도와 미국 이야기, 그리고 연예가 소식을 빼면 할 이야기가 없는 우리나라 일간지들이 귀기울여야 할 조언이다.

에코는 마지막 두 개의 에세이에서 '타자'와 '관용'의 문제를 다룬다. 첫번째 글에서 에코가 관심을 갖는 것은 타자에게 끊임없이 위해를 가해온 잔혹한 동물인 인류가 어떻게 남을 배려하는 윤리의식을 갖게 되었는가이다.

에코는 이를 통해 종교적 윤리를 초월한 자비의 가능성을 고찰한다. 비록 종교는 인류에게 남에 대한 사랑과 배려라는 고귀한 사상을 가르쳤지만 이 가르침은 남에 대한 이해와 용서 못지 않게 증오와 환멸의 방아쇠를 당기도록 요구했다. 하물며 종교적 계몽이라는 '거대서사'가 사라지는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우리는 남을 배려할 근거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가 에코가 가진 문제의식이다.

에코는 이어 관용에 대한 논의로 책을 마무리한다. 그는 '세계화'가 일상어가 된 현대에 오히려 인종차별의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관용하지 못하는지'를 묻는다. 에코가 예로 드는 것은 이탈리아에 만연한 외국인에 대한 야만적인 불관용이다.

"모든 알바니아 사람들은 도둑이나 창녀"라는 어처구니 없는 단순화 앞에는 어떤 지식과 이론도 힘을 잃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특정 지방사람들 앞에 붙이는 수식어는 야만성에서 이탈리아의 예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다. 에코는 말한다.

"인종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서로 총을 쏘는 어른들에게 관용을 가르친다는 것은 시간낭비입니다. 그것은 너무 늦습니다. 그러므로 야만적 불관용은 그 뿌리부터 없애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책으로 씌이기 전에 그리고 너무 단단하고 두꺼운 행동의 껍질이 되기 전에, 아주 어린 유년기에 시작되는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주, 관용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것" p.134)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묻지 맙시다>는 편집부터 표지 디자인과 제본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출판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단어 하나 하나까지 섬세하게 옮긴 역자의 꼼꼼한 번역도 칭찬 받을만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지나치게 길어진 번역투의 서술어는 가끔씩 독자의 몰입을 방해한다. 그리고 편집상의 오류로 보이는 몇 가지 사소한 오역들도 간간히 보인다.

이 책을 접하고 반가웠던 또 다른 점은 그동안 '열린책들'이 발행한 에코의 책 표지에 무겁게 자리잡고 있던 작가에 대한 허황된 찬사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에코 자신도 사양하는 그런 과분한 수사가 아니라, 독자가 글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작가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소개하는 것이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출판되었을 때, 많은 일간지가 이에 대한 소개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그 중 어떤 신문도 자신들에 대한 에코의 비판을 소개하지 않았다. 이 책이 자신들과는 무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책을 덮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코가 한국의 신문사들이 부수확장을 위해 자전거까지 돌린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 책의 두께가 조금 더 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일간지의 최대 광고주 가운데 하나인 자동차회사가 자신들의 '경쟁상품'을 경품으로 돌리는 신문사에 광고를 주는 모습에서 '자비'의 원형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기업의 돈을 받아 무공해 이동수단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신문사의 환경운동에서 자본주의의 희망을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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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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