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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이 한국 영화사에 또 하나의 명작으로 남을 모양이다. 출연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세밀한 묘사, 잘 짜여진 이야기 전개 등 영화에 대한 여러가지 칭찬이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영화 기법으로서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람의 절망을 보여주는 포스트모던 영화라고 보고 싶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현재 살아있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멀쩡하게 살아있었던 멀지 않은 과거에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십수년이 지난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고민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이 죽어갔는데 도대체 누가 죽였는지 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5.18을 국가적 기념일로 지내고 있지만 그날에 죽어간 우리의 이웃들의 죽음에 대해 아직도 정확한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희생자는 있지만 범인이 없는 현실. 그것이 바로 영화가 지적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공권력인 형사들이 비이성적인 방법으로(시골형사 송강호) 혹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서울형사 김상경) 살인자를 추적해도 결코 잡히지 않았다.

영화보다 더 기막힌 것은 영화를 보고난 오늘날 우리들의 태도이다. 영화평이나 영화 감상문 어디에서도 죽은 자의 억울함이나 명복을 비는 이야기 보다는 감독이 어쨌고 배우가 어쨌고 하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나, 아직도 범인을 잡자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현실의 슬픔이 있고 말하는 것의 한계를 느낀다.

최근 NEIS의 논란으로 이야기를 옮겨보자.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오리무중인 것처럼, 사실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NEIS를 어떻게 풀어야 할 지 모르고 있다. 시골형사 박두만이나 그 조수인 조용구가 공권력을 배경으로 폭력으로 범인을 찍어내듯이 오늘날의 교육당국이나 보수언론들도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일부 보수적 교사집단들도) NEIS로 파생된 문제의 범인으로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몰아붙이고 있다.

심지어는 과학적으로 수사하는 서태윤의 치밀한 과학적 수사 역시 범인을 잡고자하는 강렬한 의지는 보이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 영화의 내용인 것처럼 오늘날 NEIS에 관한 전문가의 지식이나 노력 역시 NEIS문제에 대한 뚜렷한 결론을 주지 못하고 있다.

어느 평자의 말처럼 이 영화를 보는 우리들 조차도 결국은 박두만이나 서태윤보다 한치도 나을 것이 없음을 일깨운다. 화성의 연쇄살인사건 만큼 오늘날의 NEIS를 바라보는 우리도 무력감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무력감은 결코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형사들의 시선에서 볼때 우리는 무력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사건의 현장이었던 그날이나 십수년이 지난 오늘이나 한결같이 우리를 억누르는 그 무력감을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이 슬픈 무력감을 벗어날수 있을까?

그 답은 왜 우리는 이러한 무력감을 느끼는가 보다 근원적 질문을 할 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인의 추억>에서 느끼는 무력감의 근저에는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 죽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 여자친구가 죽은 것 같은 그 죽음에 대한 슬픔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 무력감이다.

NEIS문제도 같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NEIS가 또 다른 <살인의 추억>으로 남지 않도록, 또 다른 무력감의 원인으로 남지 않도록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NEIS로 인해 평범한 우리의 이웃인 교사나 학생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영화 <살인의 추억>이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형사 박두만이나 조용구가 범인을 잡느라고 고생했지만 범인을 못잡아서가 아니고, 죽어간 우리의 이웃의 억울함 때문이다. NEIS가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은 교육부나 정보관리교사들이 고생해서가 아니고 NEIS로 피해를 입게될 우리의 아들 딸과 그들의 학부모 그리고 그들의 선생님들의 피해가 염려되어서이다.

NEIS가 교육당국이나 교총이 원하듯이 그대로 시행된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살인의 추억>을 만들어 낼 것이다. 뻔히 예상되는 인권문제는 영화에서 살인사건처럼 피해로만 남을 것이고 당국은 형사들처럼 범인을 찾아 폭력과 이성을 동원하겠지만 영화의 결론처럼 미제의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5.18처럼.....

또 다른 <살인의 추억>을 만들지 않는 길은 영화속의 피해자들을 기억하며, 오늘날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 살인 사건의 피날레는 온 주민들이 관의 주도로 집단적인 자기 방어훈련인 등화관제 시간 동안에 일어난다. 어느 평자가 표현했듯이 '민방위 본부에서 알려드립니다…'로 시작하던 그 익숙한 안내 방송, 삽시간에 온 동네가 암흑에 빠지던 그 광경, 세상을 칠흙 같은 어둠에 빠지게 했던 그 집단적 관제훈련이 한 소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간접적인 배경막이다.

"사방이 빡빡하게 경계의 눈초리로 채워져 있는 듯한 그 감시와 처벌의 시대에 공권력은 실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안위를 보장하는 데는 터무니없이 무능하다.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강해 보이던 공권력이 실제로는 누수투성이었다는 모순은 모든 것이 어둠으로 통제된 세상에서 소녀의 옷가지를 벗기는 범인의 밝은 손전등 불빛과의 대비를 통해 강렬하게 드러난다."(영화평론가 김영진의 글)

영화에 나오는 공권력은 집단적인 자기방어를 위해 등화관제훈련도 하고 또 평화를 해치는 자를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해 박두만과 서태윤같은 형사들도 있지만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지 못하고 우울한 무력감만 남기는 것처럼, NEIS가 시행된다면 이 평과 똑같은 현실이 나타날 것 같지 않은가?

살인의 추억을 갖고 있는 당신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던 때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NEIS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오늘에는 어떠한 추억을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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