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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씨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는 온갖 생소한 꽃 이름들이 나옵니다. 꽃은 그에게 원초적 경험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세대에게는 자연 대신 ‘세븐일레븐’ 같은 게 원초적 경험입니다.” (97년 10월 29일, 문화일보)

이는 김영하가 그의 첫 중단편 소설집 <호출>(1997, 문학동네)을 발표했을 때 했던 말이다. 그 당시 문학계는 이러한 그에게 ‘90년대 문학 게릴라’, ‘신세대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걸어주며, 관심을 보였다.

문단 역사상 처음으로 한쪽 귀에 귀고리를 단채 문학상 시상대에 올랐던 김영하, 그의 생동감있는 생활만큼이나 신선하고 어쩌면 반사회적인 그의 소설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미 90년대를 훌쩍 지나 2000년대의 하루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아직도 그의 메시지는 유효한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그의 첫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의 모든 대상은 지극히 性적이다. 이러한 성적 코드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 ‘빠져나갈 수 없는 규정된 공간 안’이라는 답답한 설정 상황과 맞물린다. 바람피는 상대인 그 여자(가희)의 性을 탐하기 위해 버려진 승용차의 트렁크 안에 들어갔다 그 곳에 갇히게 된 그는 과거와 현재를 회상한다.

그가 회상하는 기억 속엔 아내와 그 여자, 그리고 그가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비극과 희극을 오가며 전개되는데, 이는 현대의 하루라는 연극무대 위에서 정해진 각본대로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을 연상시킨다.

이 극에는 주연을 맡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인 그가 있었고, 모두의 본질의 밑바닥까지 파헤쳐버린 그 극의 마지막 장에는 더 이상 안정적인 일상이 아닌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공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연못에 빠져버린 나르키소스이다. 그는 분명 지금 돌아가고 있는 이 세계의 중심이며, 모든 가치는 그의 신념에 의해서 평가한다. 모든 대상은 그들 자신을 그에게 보여주기도 전에 이미 그의 사고체제 안에서 정의 내려진다. 이에 따라 그가 스스로 그의 연극에 조연으로 지칭하는 두 여자(‘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고 순종적으로 그밖에 모르는 그의 아내, 성현’과 ‘단순한 성적 쾌락 추구의 상대인 아내의 친구, 가희’) 역시 그에 의해 각각 맑은 날의 풍경을 담은 수채화와 덕지덕지 이중삼중 덧칠한 유화로 규정되어져 버린다.

이렇듯 그는 쉽게 규정하고, 자기식대로 살아간다. 이렇게 편견과 아집으로 가득 찬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는 불쾌감과 함께 은근히 그의 불행이라도 바라는 악의마저 들게 한다.

여기서 위와 같은 그의 모습은 오늘 날 모두 자기 잘난 멋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다. 우린 모두 자신의 무대위에서 하루하루의 극을 올리고 있다. 그 무대에는 자신이 원하는 배우들이 자신의 각본대로 대사를 왼다. 그들은 모두 나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울 속에 존재한다. 내가 손을 들면 똑같이 손을 들어주고, 웃으면 함께 웃어줄, 눈깜빡임까지 함께 해줄 거울 속에 그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대 파편화되고 지극히 개인화된 사회에 현대인으로서 살아가기에 우린 너무나 외롭고, 우리만의 무대를 갖고자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돌아오는 건 지나친 나르시시스트라는 비난과, 내가 나만의 세계를 구축한 만큼 내 옆의 그들도 이미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놓고 있는 현실, 즉 나도 그들 연극 속에 조연일 뿐이라는 허무감마저 든다.

그렇다면 우린 살아가는 순간순간 만나게 되는, 때로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모습을 보이는 주변 사람들, 혹은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넌 자기애에 도취돼 집착하는 나르시시스트야!”는 단호한 비난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린 모두 그들을 알기에, 오히려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를 포함한 이 시대의 모든 나르시시스트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내주고픈 연민의 정마저 들게 된다. 이것이 김영하가 그의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던져주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닐까? 그리고 그 메시지는 2003년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할 것이다.

호출 - 3판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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