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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대성중학교 본관 앞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 <서사>
용정 대성중학교 본관 앞에 있는 윤동주의 시비 <서사> ⓒ 박도
룡정과 안동

빡빡한 여정, 여러 곳을 바삐 둘러보다 보니 그만 점심때를 놓쳤다. 3시에는 다른 약속이 있기에 식당에서 요기할 시간도 없었다.

허 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후 마침 산 아래 마을에 빵집이 눈에 띄어 10원어치를 샀더니 월병을 두 봉지나 주었다. 맛도 있고 달리는 차에서 먹을 수도 있어서 시간 절약에다 한 끼 요기로 충분했다.

허 기사는 이내 용정 시내에 있는 대성중학교 윤동주 시비 앞에다 내려 주었다. 대성중학교는 용정중학교와 같은 교문을 쓰는 조선족 중학교였다. 이 학교 2층 전람관에는 윤동주의 사적을 모아 전시하고 있었다.

학교 본관 정면 시비에는 윤동주의 대표작으로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서시〉가 새겨져 있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용정 땅에서 읽은 〈서시〉는 새로운 맛을 느끼게 했다. 이 시는 곱씹을수록 ‘부끄러움의 아름다움’이 물씬한 절창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이 부끄러움이 아닐까? 그런데 그 부끄러움을 알고 이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몇이나 될는지.

나는 윤동주 유적지 답사를 마치면서, 자꾸만 이육사 유적지와 견주어져서 마음이 아팠다.

안동에 있는 이육사의 시비 <광야>
안동에 있는 이육사의 시비 <광야> ⓒ 박도
일제시대 저항 시인으로 두 사람을 꼽으라면 대부분 사람들은 서슴없이 윤동주와 이육사라고 할 게다.

윤동주가 일제 아래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에 대하여 자신이 온몸으로 맞서 싸우지 못한 데 대한 참회를 시를 남기다가 마침내 일본 땅에서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일경에 체포 수감된 후에 옥사한 순교자적인 시인이라면,

이육사는 평생을 일제와 온몸으로 맞서 싸우면서, 무려 17회나 투옥되는 열렬한 독립투사로, 그의 시에는 현실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는 꿋꿋한 의지가 담겨 있다.

육사 또한 동주가 돌아가기 전 해인 1944년, 이국 땅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옥사했다.

두 분 시는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절구로써 그 문학성뿐 아니라, 뒷사람들의 정신 교육에 귀중한 글감으로 자리 매김 하고 있다.

육사의 주옥같은 수많은 작품 중에서〈절정〉한 수만 소개해 본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제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시는 암담한 식민지 시대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 작품으로, 저항시의 백미(白眉) 편이다.

북방에까지 쫓기는 극한의 한계 상황 속에서도 압제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는 시인의 기개가 추상같다. 그러면서도 자기 관조의 여유와 준엄한 선비의 자세를 꼿꼿이 지닌 채, 당당한 목소리로 고통 받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기쁨을 그리고 있다.

나는 이런 작품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마다 기개 높은 시인에 대한 경외감과 아울러 ‘민족혼’이 꿈틀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둡고 무서웠던 그 시절에 이런 노래를 불렀던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약소민족이란 패배 의식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분의 생가를 같은 시기에 둘러보면서, 그 고향 사람들이 갖는 시인에 대한 사랑이나 생가의 보존 상태가 아주 다름을 느꼈다.

고향사람들의 정성으로 복원된 윤동주 생가
고향사람들의 정성으로 복원된 윤동주 생가 ⓒ 박도
윤동주의 고향 용정 명동촌 사람들은 윤동주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의 생가를 잘 복원하여 보존하면서 그분을 사랑하는 나그네를 불러 모으는 데 반해, 안동 시내에 있는 이육사 생가는 너무나 소홀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아니 보존이라기보다 그대로 팽개친 듯 보였다.

내가 1999년 7월 25일, 석주 선생 생가 임청각(臨淸閣)을 답사하러 안동으로 내려가면서, 그곳이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의 고향이라는 데에 자못 기대가 컸었다.

안동은 모두가 인정하는 양반의 고장, 문화의 고장이 아닌가. 다행히 안동댐 밑에 있는 민속박물관 곁에서 육사 시비를 만날 수 있었지만, 육사 생가를 둘러봤을 때는 어떤 분노를 느꼈다.

안동 시내 한복판에 있는 육사 생가는 찾아가는 표지판도 없었다. 애써 찾아갔지만, 누군가 현재도 살림을 살고 있었는데, 대문은 굳게 잠긴 채, 너무나 초라하게 방치돼 있었다.

나는 그 집 앞 축대에 올라 집안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지만 빨래가 널려 있어 앵글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마당에 ‘이육사 생가’라는 알루미늄 판 안내문이 마냥 을씨년스러웠다.

후손이나 문중에서 이 위대한 시인의 생가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다면 안동시에서는 마땅히 그 집을 사서 제대로 관리하는 게, 문화 안동에 걸맞은 일이 아닐까?

임청각의 군자정
임청각의 군자정 ⓒ 박도
임정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 임청각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임시 정부 초대 국무령은 엄연히 국가원수다.

그것도 나라를 빼앗긴 망명정부 때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독립한 나라라면 마땅히 그에 따른 예우를 해줘야 할 텐데 생가는 퇴락하고, 후손은 그 생가를 관리할 능력조차 없어 차라리 국가에다 헌납하고자 그 수순을 밟고 있다.

내가 설핏 돌아본 탓인지는 몰라도 오늘의 안동도 개발 논리에 밀려 옛 것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고층 아파트들이 불쑥불쑥 솟아나고 있었다.

그 틈에 점차 우리 고유 전통 가옥이 허물어지고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고층 건물에 그늘지고 있지나 않는지?

안동 사람들은 당신 고장을 ‘추로(鄒魯: 공자와 맹자)의 향(鄕)’이라고 자랑삼아 말한다.

이 고장에는 도산서원·호계서원·병산서원·안동향교·하회마을 등 돌볼 문화재가 지천이어서 육사의 생가 정도는 소홀했다고 변명할 지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고장이 낳은 인물 중에서 누가 더 참 애국을 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웠는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한다.

나라가 태평할 때 정승 판서가 많이 나와서 고장을 빛낸 업적과, 국난을 당해 온몸으로 조국 광복에 힘쓰면서 그 울분을 시로써 승화시킨 업적 중. 어느 것이 더 진정한 애국인가를.

일찍이 내가 둘러본 전라도 강진의 김영랑 생가나 다산 유배지도, 강원도 평창의 이효석 생가도 육사 생가처럼 그렇게 궁색하지는 않았다.

강진이나 평창 사람들은 당신 고장이 ‘문화의 향(鄕)’이라고 떠벌리지는 않았다.

호텔 계단 난간에 설치된 미야자와 겐지의 <눈 건너기>에 나오는 여우들의 모형
호텔 계단 난간에 설치된 미야자와 겐지의 <눈 건너기>에 나오는 여우들의 모형 ⓒ 박도
위대한 작가는 고향이 만든다.

고향 산수가 작가의 영혼을 살찌우고, 또한 고향사람이 작가를 키운다. 고향사람은 두고두고 작가가 남긴 작품으로 긍지를 느끼며 살아간다.

내가 지난 2003년 2월, 일본의 북동북 지방 이와테(岩手) 현을 찾았을 때 온 현이 미야자와 겐지로 뒤덮을 정도였다.

내가 묵었던 호텔의 입구와 계단 난간에도 겐지의 작품에 나오는 모형을 만들어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나를 안내했던 구로타란 공무원의 명함에도 겐지의 작품에 나온다는 첼로를 새겨넣어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견강부회일지 모르겠으나 그 명함을 받으면서 순간 이 정신이 바로 일본이 한국을 자기네 식민지로 만든 원동력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네를 따라가자면 한참 멀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시인 단테의 고향 피렌체 사람들은 그가 죽은 지 6백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단테를 몹시도 사랑하고 있다.

피렌체의 여러 골목에는 단테의 <신곡> 구절들을 석판에 새겨 벽에 붙여 놓고 그를 기리고 있다.

이와테현 관광진흥주사 구로타의 명함,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에 나오는 첼로를 명함 앞면에, 겐지의 유작을 뒷면에 새겼다. 이런 문화수준의 차이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식민지가 된 것은 아닐까?
이와테현 관광진흥주사 구로타의 명함,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에 나오는 첼로를 명함 앞면에, 겐지의 유작을 뒷면에 새겼다. 이런 문화수준의 차이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식민지가 된 것은 아닐까? ⓒ 박도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영국의 스트래트퍼드는 인구 2만의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그의 생가와 기념관, 무덤을 찾기 위하여 세계 각지에서 연 100만 명이나 몰려든다고 한다.

위대한 작가의 고향은 그로 인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기도 한다.

국민소득이 조금 높아진다고 선진국, 문화민족이 되는 게 아니다. 거기에 문화수준이 따라야 한다. 창피한 얘기지만 우리의 문화수준은 아직도 한참 아래다.

온 나라가 경제, 경제, 돈, 돈으로 걸신들린 것 같다. 대통령을 한 사람까지 돈에 환장해서 몰래 감춰두다 탄로가 나자 대통령한 것도 부끄럽다고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면서 백성한테 고개숙인 나라이고 보면 더 말해 뭘하겠는가?

나도 그런 대기 속에서 호흡했으니 예외라고 말하지 않겠다.

이런 수준의 나라를 미국이, 일본이 얼마나 우습게 보겠는가? 그들의 속내는 한국이란 나라는 돈 몇 푼이면 나라도 삼킬 수 있다는, 그야말로 호구 중에 호구로 볼 게다.

문화의 고장, 양반의 고장이라는 안동조차도 내 보기에는 룡정사람보다 문화수준이나 역사의식이 뒤지고 있는 듯 보였다.

한 예술가는 그를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이 만든다. 하지만 한 위대한 시인마저도 고향사람이 묻어버리는 것 같아서 울분이 삭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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