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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싹 기르던 추억

소 외양간과 돼지우리에서 외양짚(소똥, 돼지똥과 볏짚이 섞인 것)을 꺼내는데 세 부자가 함께 해도 하루 꼬박 걸렸다. 겨우내 밟아댔으니 차곡차곡 쌓여 늘어붙고 양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하룻밤 자고 나자 감나무 아래에 있는 퇴비 자리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난다. 푸대자루에 넣어 잘 밀봉한 홍어를 삭히면 한나절이면 충분하겠다 싶게 고열을 쉬지 않고 뱉어 낸다.

방안 뒤주에 왕겨와 함께 겨우내 보관한 고구마는 뾰족뾰족 붉은 움을 틔웠다. 배고픈 아이들이 삶아 먹고, 구워 먹고, 생으로 잘라먹는데도 한계가 있다. 아이들 생각 속에도 그 달짝지근한 맛이 한껏 고여 있어 신물이 날 지경이었으니 한 가마는 먹지 않고 남겨둘 수밖에 없잖겠는가? 썰매타기가 끝나갈 무렵부터는 누구도 고구마를 찾지 않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이른 봄날. 어른들은 고구마 싹을 본격 틔우기 위해 동네 흙구덩이로 우리들을 데리고 가셨다. 아버지와 형, 나는 지게를 지고 어머니는 비료 부대 한 개를 갖고 괭이와 삽을 챙겼다. 곱고 깊숙이 묻힌 붉고 오염되지 않은 생 흙(황토)을 한 짐씩 퍼서 집으로 왔다.

마당에 흙을 부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2m 높이 망웃(퇴비) 더미 한가운데에 삽으로 흙을 끼얹었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셔서 고구마 가마니를 들고 나오신다. 흙이 도톰하게 자리 잡았다. 이제 그 위에 아이 머리통 만한 물고구마와 한 주먹 크기의 밤고구마를 하나하나 올려놓고 흙을 살살 끼얹어 주면 된다.

초반 며칠은 거적이나 비닐 남은 것을 주어다가 씌워주고 가스가 차지 않게 구멍을 몇 개 내주었다. 차차 크는 모양과 날씨 풀리는 정도를 봐가며 완전히 열어주면 된다. 이렇게 해야 늦서리에 말라죽는 일이 없다. 이처럼 망웃자리에서 움을 틔우면 따로 비닐 하우스를 설치할 필요도 없이 짧은 기간에 한 자(尺)나 되는 고구마 싹을 얻을 수 있었다.

고구마 순 붙이기

농사일은 한 번 부지런을 떨면 한없이 부지런해야 한다. 비오는 날이라고 쉬는 법이 없다. 비오면 비오는 대로, 눈오면 눈오는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할 일이 수북이 쌓여 기다리고 있는 게 농사다. 논농사, 밭농사에 벼, 보리, 밀, 콩, 팥, 고구마, 감자, 옥수수, 수수, 오이, 호박, 면화, 누에, 길쌈에 대마 농사 등 수십 수백 가지다.

농사철에 비 맞는다고 집에서 쉬면 철을 놓치기 쉽다. 남들은 시기마다 해야 할 일을 다 끝마치고 다음 일을 준비하는데 집에서 쉬면 '팔자 좋다'고 욕먹기 딱 좋다. 도롱이 입고 새 우비 등 비옷을 걸치고 쉼 없이 일을 한다. 논에 피 안 뽑는다고 '농사짓기 싫은가 보다'고 수군대는 게 농촌사회다.

그날도 마침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닷새 전부터 확 열어 젖혀뒀으므로 너울진 고구마 싹이 제법 탐스럽고 실해졌다. 새벽같이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잘 든 날로 싹싹 베어서 지게에 연장과 같이 실었다. 그렇다고 빈골(아무 것도 지지 않은 맨 몸의 상태)로 가는 게 아니다. 이미 저녁 참에 몽근(거칠다의 반대되는 말) 퇴비를 쇠스랑으로 "칵칵" 으깨 한 짐씩 실어놨다.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고 오가는데 십리가 넘는 선산이 있는 고구마 밭으로 대장정을 나섰다. 작년 이미 화전(火田)을 일구어 첫해 고구마를 한 섬 짚 가마니로 15가마를 해왔던 터라 올해도 일찌감치 낙점이 되어 있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일 없는 게 태산(泰山)이라 했거늘 왜 이리 멀단 말인가?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내려오는 것도 힘든데 산길을 기어오르는 것은 고역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잘 싸매진 여느 짐과는 성격이 다르다. 자칫 나뭇가지에 걸려 삐끗 발을 헛디뎠다가는 바지게에 얹혀진 퇴비와 함께 한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마니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비가 내리므로 바닥도 질컥거리고 미끄러웠다.

쉬기를 다섯 번 째. 드디어 선산이 보였다. 실은 백아산 차일봉이 보였다. 해발 600m 대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힘을 내 박차고 뛰다시피 밭에 이르렀다. 지게 받치는 소리가 우지끈 들린다. 'y'자 형 작대기로 지게를 잘 받쳐 둔다. 먼길을 이고 오셨던 어머니는 목이 끊어질 지경인데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긴 숨만 한 번 내쉬는 걸로 그만이시다.

먼저 새참을 먹었다. 이곳은 멀기는 하지만 일은 수월했다. 작년에 심었던 곳이라 올해 땅파기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괭이로 양쪽 흙을 둘둘 긁어모아 이랑을 만들고 그 위에 고구마 싹 아랫부분을 묻히게만 해주면 끝이었으므로 일은 일찍 끝났다.

화전으로 일군 첫 해 수확. 흥부 부럽지 않아.
짚가마로 열 다섯 가마가 넘어 집엔 고구마 창고


이런 일을 작년에도 했다. 그런데 작년에는 올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중노동이었다. 묵힌 밭도 없고 빌릴 땅도 없어 하릴없이 산에 밭을 새로 치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 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낫으로 베어내는데 이틀이 걸렸다. 벤 나무를 묶어 집에 오는 길에 지고 와야 했다.

사흘 째 되는 날 주변을 정리하고 불을 질렀다. 그래도 나무 뿌리는 여전히 박혀 있다. 나무 밭을 파기 시작했다. 나무 뿌리를 캐고캐고 또 캐 나갔다. 이러기를 사흘을 하니 붉은 색에 가까운 황토 흙이 모습을 드러낸 밭이 만들어졌다. 화전으로 일군 땅이 200평이 넘었으니 새로 농토를 얻는 기쁨에 힘든 줄도 모르고 기쁨에 가득 차 일해서 만든 우리 밭! 근처에는 내가 어른들, 형, 누나를 따라다니기 전에 만든 자잘한 다랭이 논과 밭이 여섯 배미가 따로 있었다.

첫 해 그런 고역을 치르고 나서 고구마를 심었다. 봄에 심은 고구마가 여름 버찌 따러 갔을 때 한 번 둘러보니 큰 탈없이 자라고 있었다. 마을(해발 290m) 보다 최소 150m 이상 되는 고랭지여서 서리 올 날을 가늠하기도 쉽지 않았다.

산간에 서리 내린다는 라디오 소리를 듣고 고구마 밭에 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첫 서리가 내려 고구마순은 까맣게 변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괭이를 들이대는 순간 가족들 입은 함지박만 하게 딱 벌어 졌다. 흥부네 박에서 금은보화가 나온 것 부럽지 않았다. 다들 일 하려다 말고 오복이 모여 앉았다.

"참말로 오지네!"
"어떻게 대갈통 만한 당감자가 요로코롬 많이 들어부렀다요?"
"많은 게 뭣이 걱정이여~. 남으면 소주고 돼지 삶아주면 된당께!"

부지런히 캐나갔다. 간혹 지네가 땅 속에서 기어나왔다. 농사 이래저래 지어봐도 이런 산더미 같은 수확은 지금껏 보지 못했다. 150평 쯤 되는 밭엔 시뻘건 고구마가 지천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발 딛는 곳마다 고구마다.

"검나게 많네~"
"아부지."
"왜 그냐?"
"이것을 언제 다 지고 내려간다요?"
"서너 번 왔다갔다 허면 될 거시다."

하루에 지고나르는 것을 끝마치지 못해 다음 날 까지 계속되었다. 물거리 나뭇짐보다 더 물이 가득한 고구마 덩이 때문에 싸늘한 초겨울 날 땀이 마를 새가 없었다.

그 해 겨울 우리집은 고구마로 가득 찼다. 광에 넣고 방에 수수깡을 엮어 뒤주를 만들어 쌓았다. 1t이 넘는 고구마. 늦겨울에 보니 광 마루 밑에 보관했던 것은 대체로 다 썩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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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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