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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싹 '찔구'
찔레싹 '찔구' ⓒ 김규환
찔구

참꽃 진달래가 개꽃 산철쭉과 철쭉보다 더 이쁜 것은 따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달래꽃 잎 그 쌉싸름한 맛에 취하고 나면 일은 더 많아지는데 입이 심심해진다. 그렇다고 대안을 찾으러 멀리 나갈 필요도 없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어린 싹 '찔레'를 우린 그냥 '찔구'라 했다. 나잇살 먹은 사람은 웬만한 고장 출신이어도 찔구는 안다. 찔구 모르면 시골출신 아니라는 얘기다.

오뉴월 하얀 찔레꽃 피고 늦가을 찔레 열매 익어 겨우내 단단히 붙어 있으면 앙상하고 을씨년스런 짙은 회색 분위기를 붉은 빛 열매가 흰 눈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시각적 반전을 이뤄 사람 기분을 좋게 하는 게 찔레 열매다. 겨울엔 까치밥이다. 나뭇짐 지고 내려오다 헉헉거리며 잠시 쉬노라면 찔레 열매가 있어 몇 개 따 먹어보지만 씨로 가득차 있고 떨떠름한 맛에 내 입에는 맞지 않았다.

이놈의 찔레꽃 가시는 꾸지뽕나무, 청가시덩쿨, 청미래넝쿨, 엄나무, 두릅나무 가시와 함께 무시 못할 존재여서 땔감으로도 끼워주지 않았다. 그냥 가시덤불일 뿐이다.

그런 가시나무가 긴요하게 쓰일 때가 있는데 진달래를 따먹고 나면 마땅히 먹을 게 없는지라 내 발길은 동네 밭가나 야산(野山) 가시덤불로 향한다. 마침 들녘 빛깔은 달라졌다. 푸릇푸릇한 게 여름으로 치닫고 있다.

아직 잎이 다 피지 않았으니 완연한 여름이라고 보기에 이른 때 낭창낭창 늘어진 줄기에 새순이 돋으면서 싹눈마다 파랗고 긴 새 가지를 늘어뜨릴 태세를 갖춘다. 이게 바로 찔구다.

툭 꺾어 잎사귀 따고 여린 것은 토끼처럼 송곳니로 야금야금 씹어 끊어 먹고, 조금 딱딱하게 센 것은 아랫부분 껍질을 벗겨 먹으면 덤덤하지도 않은 것이 쌉쌀하지도 않아 간이 적당하며 풀 향기가 혀에 고루 퍼져 상큼하고 달콤한 맛을 선사하고 뒷맛도 깔끔하다.

찔구는 줄기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땅 속 뿌리에서도 붉은 싹이 치고 더 두텁게 올라와 동심을 유혹한다. 줄기에서 뻗어 나오면 한 뼘 길이인데 반해 바닥 근처 뿌리에서 나오는 것은 20cm를 넘는 경우가 많아 몇 개 꺾어 집에까지 가져와 먹는데 색깔이 붉을수록 쓴맛이 강해 기분을 잡치는 수가 있다. 여린 싹이 제 한 몸 보존하기 위해 쓴맛을 품어 나온 것이리라.

찔레꽃
찔레꽃 ⓒ 김규환
삐비

찔레 싹 '찔구' 꺾어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묘가 여러 개 있다. 길 가 모퉁이를 돌아도 있고 산비탈을 조금 올라가도 있었다. 하지만 잔디의 일종인 '삐비'는 소나무 밭에 있는 묘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그늘이 많이 진 곳에서는 더욱 찾기 힘들다. 소나무의 송진과 그늘이 제 새끼는 보존할 망정 잔디를 살려 놓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또한 쓴 지 1-2년 지난 묘에는 삐비가 없다. 최소 3년 이상 되어서 사람이 심은 뗏장과 야생 잔디가 만나야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니 이런 묘를 고르는 것도 재주다. 그런 눈썰미는 이미 갖춰져 있으나 누구나 함부로 남의 묘지에 접근하는 일이란 겁나는 것이어서 대낮에도 혼자서는 가지 않았다.

동무가 한 명이라도 있어야 용기를 내서 올라갈 수 있었다. 귀신이 나올 까닭은 없지만 삐비 뽑다가 기절하는 친구도 간혹 있었고 울면서 줄달음 쳐 도망오는 아이도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던 <옥녀>라는 드라마 때문이다. 묘지로 걸어가는 주인공 '옥녀'와 널이 들려 꼿꼿이 서서 움직이는 옥녀 어머니가 등장하는 연속극이다.

조심조심 다가가 한 발을 살짝 묏동에 올리고 한 발은 바닥에 둬 죽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고 세밀히 관찰한다. 자세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한 뼘도 안 되는 키 작은 잔디 몸체가 유난히 배불러 곧 터져 나올 성싶은 걸 여러 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삐비'다. 아직 햇볕을 받지 않아 솜털처럼 부드러운 풀꽃인데 안에서 나올 채비를 하던 상태인 것이다.

삐비를 여러 개 먹어봐야 얼마나 배부를까마는 허기진 배를 달랠 길 없는 아이들 간식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하루라도 늦으면 양지바른 곳은 계절의 변화보다 더 빨리 하얗게 피어 일대를 수놓게 되는 데나 쓸 일이지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시기를 맞추는 일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작년 너무 일찍 가서 먹지 못하게 피어버린 '삐비'
작년 너무 일찍 가서 먹지 못하게 피어버린 '삐비' ⓒ 김규환
띠뿌리

'삐비'와 '찔구'가 먹는 것이 마냥 한가하지만은 않다. 둘 다 망태를 지고 깔(꼴) 베러 갔다가 오는 길에 먹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띠뿌리'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아직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은 때라 눈에 불을 켜고 풀을 찾아다녀야 하므로 노동 과정에서 얻는 하나의 선물이었다.

'띠뿌리'는 아직 파릇파릇 돋아나지 않은 잔디의 풀인데 논두렁이나 밭가 높은 언덕에서 풀을 캐거나 벨 때 만날 수 있다. 이런 곳에 많은 이유는 간단하다. 흙이 촘촘히 들어찬 평평한 곳에는 뿌리 박음이 좋아 노출된 부분을 찾기 힘들지만 언덕에는 논두렁 밭두렁에 돌과 자갈을 쌓아 둑을 만들었으므로 자연 경사진 부분에 잔디 뿌리가 너덜너덜 지네발톱처럼 드러나 쭉쭉 뻗어 있다. 물기라도 째작째작 모여 있는 곳이라면 노오란 뿌리가 더 실하고 두껍게 자라 곧 싹을 틔우게 되도록 한껏 양분을 머금고 있다.

그 뿌리를 툭 잘라 씻을 필요도 없이 입에 넣고 어금니로 자근자근 씹으면 벼과(禾本科) 식물 알곡 찐 맛이 나고 옥수수 줄기, 수수깡 씹어먹는 맛이 나면서도 약간은 달짝지근하고 보리피리 만들어 불 때 느끼는 야릇한 맛까지 볼 수 있다. 남은 찌꺼기야 "퉥-" 뱉어버리면 되었다.

칡넝쿨

4월 말 비오는 날이면 고사리는 발에 밟힐 지경이었다.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는 막 나온 것이라야 진짜 고사리다. 그 고사리 꺾는 일은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는 날마다 나갈 수 없어 농사일 하기 힘든 비오는 날을 골라 산으로 가신다.

6. 25 동란 때 빨치산 활동이 심했던 곳이라 공비 토벌을 명목으로 이승만 정권 때 두 번, 박정희 정권 때 또 한 번 백아산 일대 광활한 산에 의도적으로 불을 질렀기 때문에 햇볕과 그늘이 적당한 활잡목(闊雜木) 상태여서 고사리가 자라기도 좋고, 숲이 꽉 차지 않아 고사리 꺾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고사리 꺾으러 가신 어른들은 고사리, 고비, 취나물, 곰취, 분대, 두릅을 가지런히 망태에 담아 오고 따로 자식들 주시려고 한 자 가웃밖에 안 되는 칡넝쿨 어린 싹을 뜯어 오셨다. 학교가 파하면 어른들을 기다린 까닭이 '칡깽이' 질겅질겅 씹어 먹을 요량이었다는 것을 알고나 계셨을까?

고사리 꺾으러 가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꽃은 진달래도, 산철쭉도 아닌 바로 이 철쭉입니다. 은근하게 유혹하지 않습니까?
고사리 꺾으러 가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꽃은 진달래도, 산철쭉도 아닌 바로 이 철쭉입니다. 은근하게 유혹하지 않습니까?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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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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