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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대상 1호 복숭아. 보리와 바꿔 먹던 누나들이 그립습니다.
서리 대상 1호 복숭아. 보리와 바꿔 먹던 누나들이 그립습니다. ⓒ 김규환

복숭아 꽃 본 김에 서리 모의

보리야 얼른 자라거라. 무럭무럭 자라서 까시락 다닥다닥 붙여 네가 팰 망종(芒種) 무렵이면 내 할 일이 하나 있다. 날을 잡는 것이지 보리 한 말 훔치자는 심산이 아니다. 네가 피어 누렇게 익어 탈곡할 때가 되면 22년 전으로 돌아가 복숭아 서리할 날을 제대로 잡을 것이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고 말리니 얼른 피기나 하여라.

연애하며 입맞추고 싶은 스무 살 여인의 볼 마냥 뽀얗고 싱그럽고 풋풋한 내음 가득한 복숭아-우리는 복숭아를 '복성'이라 불렀다.-서리 한 번 하러 갈란다.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두 발이 막 모내기 해둔 논에 푹푹 빠져도 숨소리 죽이며 다가가서 한 포대 가득 담아 오리라.

중학교 3학년 때다. 한 벽지 산촌 마을에 공부 깨나 하며 1m 50cm를 갓 넘긴 키 작은 아이가 살았다. 그 학생이 1학년 아이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공포의 존재였던 선도부 활동에 재미를 붙이던 때다. 동네에서도 1~2학년들이 말썽을 피우면 집으로 따로 불러 혼내주곤 했으니 3학년 형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고 무진 애쓰던 아이들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슬슬 피해 자기네들끼리 조용히 노는 수밖에 없었다. 동네 아이들에겐 오히려 지네들 뒤를 봐주기보다 소리 죽이며 살게 만들었으니 그 1년은 차라리 암흑기(暗黑期)라고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개복숭아꽃
개복숭아꽃 ⓒ 김규환
집안일이 학업보다 중요했던 시절, 학교로 도망을 치다

그 시절에는 보리를 베어 타맥(打麥)을 하고 곧바로 논을 갈아 모를 쪄 모내기를 하는 2모작 경작이라 애 어른 할 것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 때가 일 년 중 가장 바쁜 철이다.

어른은 허리 한 번 펴기 힘들었다. 새벽 4시에 해보다 일찍 일어나서 이슬 밟으며 논으로 나가서 밤 9시가 넘어 달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농사다. 이런 삶의 반복이 최소 스무 날 이상 이어진다.

중학교 간 이후 '농번기 방학'이 있던 초등학교 때와는 형편이 달라졌다. 따로 농번기 방학을 주지 않고 30여 마을을 돌아가며 보리를 베러 가는 터에 집에서는 난리법석이었다. 정작 바쁜 곳은 천수답(泉水畓)이 많은 우리 동네 인근 골안 7동(洞)인데 마을과 농지 규모가 작다고 한 번도 아이들을 내 주지도 않고 다른 구역으로만 배치했으니 어른에겐 죽을 노릇이었다.

당연지사 열에 세 명은 집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일주일 넘게 붙잡혀 집안 일을 거들었으니 개근상 받기는 다 틀렸다. 나에게도 어른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만 일요일에 따로 날을 잡아 모내기를 할 수도 없는 처지다. 품앗이로 농사 짓는 때라 그런 황금같은 날에 천신이 돌아온다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모가 웃자라면 제 구실을 못하므로 여러 정황을 살펴 모내기 날을 잡고 저녁 밥상 앞에서 한 말씀하신다.

"규환아, 낼 집안일 거들어라와~"
"예?"
"뭔 대답이 그리 신통치 못혀?"
"학교 가야한디라우~"
"낼은 모심어야됭께 학교가지 말고 모쟁이 해야한당께!"
"예…."
"긍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쇠죽 쒀놓고 소쟁이 논으로 나가봐…."
"알았당께요."

저녁 먹으면서 했던 대화는 대화가 아니었다. 명령이 떨어지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리 몽뎅이 부러질 일이었다. 아무 말 않고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느 날과 같이 아침이 시작되었다. 아침 먹을 때까지는 아무렇지 않은 듯 협력한다.

이윽고 못 줄 챙기고 소여물 주고, 스무 명이 먹을 오전 새꺼리(새참) 준비하느라 바쁜 틈을 타 담박에 학교로 줄달음을 쳐 도망쳐버리니 바쁜 통에 나를 잡으러 오실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동네만 빠져나가면 그만이었다. 저녁에 와도 이미 상황은 종료가 되었으니 뭐라 하시겠는가? 힘든 일을 하시면서도 공부 열심히 하겠다는 아들이 대견스럽기도 하셨을 것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은 밥 바구리(바구니의 방언) 나르는 일과 막걸리 받아오고 물 길러 나르는데 요긴하게 쓰였다. 초등학교 5~6학년 이상은 어른과 똑 같은 일을 했다. 남자들은 아이 보는 일에 쓰기에는 당시에 일손도 달리고 힘도 어른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지게에 발채를 얹어 모를 바지게에 지고 '장가가기 힘들다'는 '모쟁이'를 해야했다.

부천 중동에 가로수로 심어진 복사꽃
부천 중동에 가로수로 심어진 복사꽃 ⓒ 김규환
'운명의 서리 날'을 잡고 아이들을 긁어모아

보리 이삭 줍는 것은 형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삭은 천두 아줌마 차지가 되었다. 우리야 따로 이삭을 주워도 보리 더미에 섞이는 통에 물대기 직전 잠시 줍는 것 외에는 오래 그 일을 하지 못했고 나중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했으므로 매달려 줍는 것도 흥이 나지 않았다.

모내기가 절반 쯤 되어가던 어느날 아침 등교길. 달그락 덜커덩거리며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제법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버스를 타면 아침밥 먹은 것이 7km되는 중학교까지 가면 이내 소화가 다 되어 배가 고파지게 마련이다.

복조리로 유명한 아랫마을 송단리에 다다르자 내 눈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송단리 마을 뒤쪽에 있던 과수원에 발갛게 익은 복숭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의미심장한 작은 소리를 내며 좌우 2.0 시력으로 밖을 내다봤다. 복숭아꽃이 핀 다음날부터 하루하루를 손꼽아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

'음-.'
'그래, 반드시 오늘 결행한다.'

그날은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주워 모으느라 공부가 될 리 없었다. 1학년 세 명, 2학년 두 명, 3학년은 나 포함 두 명을 점심 때 고구마 튀김을 사주면서 불러서 작전 지시를 했다.

"학교 파하면 집에 가서 바로 자지 말고 밥 먹고 제일 아랫집으로 나올 것, 차대기는 내가 챙길 테니 옷이나 간편하게 입고 나오라"고 했다.

북한산에 핀 개복사꽃
북한산에 핀 개복사꽃 ⓒ 김규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학교를 끝내도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자전거 타고 다닌 2학년 때까지는 종례가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가면 되었지만 통학 버스라 불렸던 '송광교통'은 밤 7시 20분에 학교 앞에 도착했다. 비포장 도로 7km를 여름철에 걷는 것은 고역이므로 한두 시간 소일하며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해 보니 8시가 넘었다. 밥을 먹고 8시 반에 다들 모였다.

이제 복숭아밭이 있는 송단리로 원정을 가면 된다. 들녘엔 넓어진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꽥꽥꽥꽥" 연신 크게 울어대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음력 초사흗날이라 어둠은 더 짙었다. 우마차가 지나갈 정도의 좁은 마을길을 빠져 나와 송단리로 접어드는 논둑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같이 간 3학년 병문이가 먼저 한마디했다.

"얘들아, 머리 숙여라! 글고 어떤 일이 있어도 소리 지르면 안 된다잉? 알았제?"
"알았어."
"만약 잽히면 누가 시켰는가 말하면 안된다. 만일 발설하면 내일 니네들 죽고 나 죽는다. 알았냐?"
"응."

단단히 다짐을 받았다. 꾸불꾸불한 논둑 길을 고개 숙여 걷기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내기 한 지 며칠 안된 논두렁은 진흙을 높게 붙여 놓고 콩을 심어 놓아 조금만 헛디디면 미끄러져 논으로 철퍼덕 빠지는 수가 있다.

"윽!"
"왜 그려?"
"미끄러져불었구만…."
논으로 떨어진 아이는 1학년 병철이었다.

"손잡아줘라."
"성, 하나도 안 보인당께."
"긍께 조심해야제."

도화, 됴화, 桃花, 복숭아꽃, 복사꽃
도화, 됴화, 桃花, 복숭아꽃, 복사꽃 ⓒ 김규환
"형, 복숭아가 한나도 없어."

복숭아가 있는 곳까지는 멀지 않다. 하지만 마을을 통과해야 하므로 지금부터가 문제다. 산비탈을 끼고 돌아야만 하니 한 번도 가보지 않아 걱정이 태산이다. 기침은 왜 이럴 때 더 나오려는지? 꽤 큰 도랑을 철벅거리며 그냥 건넜다. 이제 이 산만 통과하면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복숭아를 배불리 먹어 볼 수 있다. 개 두 마리가 박자를 맞춰 짖는 소리도 들렸다.

찔레, 청가시덩쿨과 갖가지 나뭇가지에 걸려 윗도리가 곳곳이 나풀거리고 소매 아랫단 살갗은 아리고 쓰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이 산 모퉁이를 다 통과했으므로 밭을 기어오르면 된다.

가장 먼저 도착해 복숭아나무를 확인하고 더듬더듬 잎사귀를 만지며 열매를 찾았다. 이상하게도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나뭇가지가 하늘로 향해 높이 둥둥 떠 있었다.

'어? 이상하다. 분명히 아침에 있었는데?'

곧 다다른 아이들도 만져보고는,

"형, 복숭아가 한나도 없어."
"글게 말이다."
"조금 위쪽으로 한 번 가보자."
"알았어…."

위쪽에 가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남은 게 없었다. 벌레 먹은 복숭아 하나 남겨 놓지 않다니…. 신은 우리에게 그렇게 냉정했다. 불 꺼진 방에서 벌레 먹은 복숭아, 벌레 드글드글한 복숭아 먹을 기회 한 번 안주다니!

"야, 모이라고 해라."
"안되겠다. 집으로 가자."

복숭아 서리는 이렇게 처절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허무했다. 허탈했다. 유일한 과수원이라 복숭아 한 개는 더 간절했으니 우리들의 실망은 더 컸다. 터덜터덜 힘없이 걸으며 빈 자루 7개만 탓하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냇가에서 온 몸을 씻었다.

다음날 확인해 보니 우리가 서리하러 간 그날 낮에 다 따서 팔았단다.

홍도꽃, 홍도화, 붉은복숭아꽃
홍도꽃, 홍도화, 붉은복숭아꽃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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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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