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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항일 전적지 기념비. 우리 독립군이 대첩을 거둔데 견주어 너무 초라한 나무비라서 선열을 우러러 뵙기가 여간 부끄럽지 않았다.
청산리 항일 전적지 기념비. 우리 독립군이 대첩을 거둔데 견주어 너무 초라한 나무비라서 선열을 우러러 뵙기가 여간 부끄럽지 않았다. ⓒ 박도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지난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앞서가는 나라의 현명한 백성들은 똑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으려고 지난 역사를 되새기며, 오늘에 일어난 일을 올곧게 기록하면서 후대에 교훈으로 남긴다.

이번 답사 길에서 만난 연변대학 역사학자 박창욱 교수는 젊은 세대가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매우 안타까워하면서“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이라는 극언까지 했다.

지난 20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굴종과 오욕의 시대’였다. 그 전반부는 일제 아래서 망국민으로 굴종의 세월이었다.

그 후반부는 외세에 힘입은 해방으로 그에 따른 국토의 분단, 동족상잔의 피 비린내 나는 쓰라림, 남과 북의 겨레가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총부리를 겨눈 채 서로 헐뜯으며 오욕의 세월을 보냈다. 이런 아픔의 세월 속에서 우리 민족의 피해는 엄청나게 컸다.

상하이시 노만구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 터. 일제시대 민족혼을 지닌 젊은이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상하이시 노만구 마당로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 터. 일제시대 민족혼을 지닌 젊은이들의 동경 대상이었다. ⓒ 박도
한 세기를 보낸 지금, 물질의 피해는 어느 정도 제자리로 복원할 수 있었지만 정신의 피해 -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았던 - 복원은 아직도 까마득히 멀기만 하다. 그로 인해 민족정기의 훼손, 정의에 대한 불감증, 도덕과 양심의 파탄은 우리 사회 곳곳에 너무나 깊이 퍼져 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의원이 삼대를 계속해 오지 않았으면, 그가 지어주는 약을 먹지 않는다(醫不三世 不服其藥)”고 하였다. 무슨 일이든 삼대는 해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몇 해 전, 한 모임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났다. 그분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선생의 증손 이항증 선생이었다.

그 얼마 후, 그분이 보내준 조상의 유고집을 읽으면서 삼대가 독립 운동가라는데 크게 놀랐다.

한편으로는 그 동안 가짜 애국자들이 진짜 애국자인 양 마구 날뛰어 몹시 역겨웠던 터에, 진짜 애국자를 문헌으로나마 만남으로써 우리나라가 그 동안 수많은 외침 속에서도 꿋꿋이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까닭을 알았다.

상하이 루쉰 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 기념석.  "중국의 백만대군이 못할 일을 한국의 한 젊은이가 했다"고 장개석 주석이 격찬했다.
상하이 루쉰 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 의거 현장 기념석. "중국의 백만대군이 못할 일을 한국의 한 젊은이가 했다"고 장개석 주석이 격찬했다. ⓒ 박도
옛 글에 “집이 가난해지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家貧則思良妻, 國亂則思良相)” 라 한즉, 국난을 당하여 유림의 가문으로 항일 독립 전선에 삼대가 몸 바쳐 끝까지 일제와 맞서 싸우면서 고난의 길을 걸어온 석주 선생 일가의 투쟁사를 보면서 그 거룩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또 사돈 집안도 일제 때 의병 활동으로 쟁쟁한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 가문이요, 항일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또한 인척이었다. 내 견문이 얕은 바로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몇 안 되는 항일 명문 집안이다.

글쓴이로서 이런 가문을 배경으로 삼는 일은 대단히 의의 있고 보람 있는 일이다. 순간 나는 욕심을 갖다가 지레 포기한 것은, 우선 내가 아는 게 너무 적을뿐더러 과연 이런 글을 쓸 만큼 평소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였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에 부끄러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또한, 삼대 유고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아쉬움이 많았고, 독립 운동사에도 까막눈인 데다가 글의 배경이 되는 만주 일대가 나로서는 얘기로만 전해 듣던 전설 속의 세상이기에 내 욕심을 접었다.

그런 중, 행촌문화원 이영기(李英基) 이사장님께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셔서 내 분수도 잊은 채 덥석 항일 유적지 답사 길에 올랐다.

이번 답사는 나 개인으로 너무나 과분한 영광이었다. 이항증 선생과 중국 대륙을 누비며 무장 투쟁을 하다가 조국 광복 제단에다 목숨을 바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 손자 김중생 선생과 동행하면서 그분들의 알뜰한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

국립묘지 임정묘역.
국립묘지 임정묘역. ⓒ 박도
우리 일행은 답사에 앞서 국립묘지 임정 묘역을 찾아 여러 선열에게 고유 인사를 올렸다. 선열들의 발자취를 백 분의 일이나마 제대로 보고, 바로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땅에 엎드려 마음속으로 빌었다.

우리나라가 분단되지 않았다면, 당시 우리 조상들의 망명길을 따라가는 게 마땅하련만, 현재의 여건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항공편으로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거기서 상하이(上海)로, 동북 삼성으로 옮겨 다니면서 그 일대에 흩어져 있는 항일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나는 답사 중, 빼앗긴 나라를 찾겠다고 정든 고향 산천과 전답을 다 버리고 오직 뜨거운 마음으로 망명길에 올라 끝내 해방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이역 땅에 묻힌 훌륭한 여러 유명 무명의 선열을 만나서 무척 기뻤다.

한편으로는 이분들이 남의 땅에서 흘린 피의 발자취가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세월과 함께 역사의 뒤꼍 길로 묻혀버리는 현실에 가슴 아팠다.

답사를 마친 소감은 나라의 힘이 약하고 백성들의 애국심이 결여되면 외침을 당하여 나라를 잃게 되고, 또 한 번 나라를 빼앗기면 다시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동안 망국민들이 겪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의 장래는 그 나라 지도층의 도덕성과 젊은이들의 애국심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는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글쓴이로서 거룩하신 선열들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내 학식이 부족하고, 넓으나 넓은 중국 대륙에 흩어진 선열들의 피 어린 발자취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돌아보고서 이 글을 쓴다는 게 가신 임들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내 어설픈 기록이 ‘장님 코끼리 더듬고 말하듯’ 잘못된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부족함은 다른 분이 메워 주리라 기대하면서 감히 무딘 필을 들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임시정부 묘역에서 고유제를 지낸 후 (왼쪽에서 김중생, 이항증, 필자)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임시정부 묘역에서 고유제를 지낸 후 (왼쪽에서 김중생, 이항증, 필자) ⓒ 박도
이 기사를 쓰면서 선배 학자들의 연구논문, 저서에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히며 다음 세대를 위해 가능한 쉽게 쓰려고 그 원전을 인용함에 다소 손상이 간 점을 깊이 사죄드린다.

이번 답사 여정은 교통 편의상 베이징→ 상하이→ 동북 삼성 순으로 옮겨 다녔으나, 이 연재에서는 대체로 시대 순서에 따라 항일유적지가 많은 동북 삼성→ 상하이→ 베이징 편으로 엮었다. 여기 실은 사진들도 대부분 서툰 내 솜씨로 찍었다.

한 장의 사진을 얻기 위해 아찔한 순간도, 무릎을 깬 일도 있었지만, 끝내 놓친 순간도 많았다. 아무튼 부족한 사람이 답사기간 동안 눈을 부릅뜨고 역사의 현장을 보고, 증언을 들으며 기록하고, 카메라에 담느라고 부지런히 다리품을 팔았다.

아무튼 이 연재가 일제 아래 이역에서 조국 해방의 비원을 품고 돌아가신 독립 전사 원혼에 조금이라도 진혼이 되었으면 좋겠다.

<항일유적답사기> 그 첫 장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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