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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우리 어머니 휠체어
2003년 우리 어머니 휠체어 ⓒ 박철
김포 어느 지점인가 신호에 걸려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반대편 차선에서 매우 위급한 상황인지 어느 아주머니가 손짓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차를 갓길에 세우고 내려서 보니 남편인 듯한 사람은 다리가 한쪽이 없는 장애인이었다. 이들 부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가 움직이질 않는 것이었다. 아주머니 보고 뒤에서 차를 밀라고 하고 핸들을 꺾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자동차정비에 대하여 문외한인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차가 어느 회사제품인가를 확인하고 핸드폰으로 A/S센터에 콜을 해주는 것뿐이었다. A/S센터 직원과 한참 차의 상태와 차가 서있는 지점에 대해서 전화를 하는 중이었는데, 별안간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한쪽 다리가 없어 목발을 집고 서있는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거의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이었다. 남편은 목발을 짚고 어쩔 줄을 몰라 절절 매고 서있다.

그런데 가만 아주머니의 얘기를 들어보니 차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자동차 연료가 떨어져서 자동차가 멈춰섰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렇담 진작 얘기를 할 것이지. 그 아주머니 장애인인 남편에게,

“왜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칠칠맞게 자동차를 몰고 다녀요! 왜 기름이 넣지 않고 다니다 나를 망신시키는 거야? 내가 식당만 안 나가면 운전을 배웠을 텐데, 아이구! 나는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여자야!”

하며 펄펄 뛰는 것이었다. 가만 차안을 살펴보니 특별장치가 부착되어 있는 허름한 장애인 차였다. 내가 머쓱해서 돌아서려는데 그 아저씨의 눈빛을 보았다. 눈빛이 너무 애처로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런데 돌아서면서 생각이 그 아주머니도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 기름이 떨어진 것 때문에 그 아주머니가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장애인 남편을 둔 가정이 직면한 아픔과 사회적인 상실감, 그리고 자기 처지에 대한 분노가 그런 식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그날 큰 대로변에서 그 아주머니의 거친 하소와 몸부림이 며칠동안 내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장애인의 차별과 사회적 냉대에서 오는 병리현상이 가정에서까지 심각한 갈등과 부조화를 낳고 있다. 또 각종 대형사고에 노출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사고 피해자의 당사자가 바로 내가 될 수 있는 개연성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누구도 각종 사고에서 오는 피해를 피해갈 수 없으며,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2001년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장옥선 권사. 지석교회 앞에서.
2001년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장옥선 권사. 지석교회 앞에서. ⓒ 박철
그렇다면, 먼저 사회적인 시스템이 보장되어야 한다. 참여정부에서 국민의 정부에서 기초한 장애인 정책을 전면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생색내기 정책은 지양되어야 한다. 기초보호대상자 선정에서도 장애인 우선 수급이 이루어져야 한다. 음지에 있는 장애인들이 양지로 나올 수 있도록 모든 편의시설과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장애인도 떳떳한 생활인으로서 자리 매김 할 수 있는 통합적인 사회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은 나만의 주문이 아니다. 이 사회를 건강한 사회를 묶을 수 있는 하나의 든든한 연결고리이다.

우리 집에도 어머니가 척추 2급 장애인이다. 올해 72세인데, 5년 전 척추수술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하체를 쓰지 못하신다. 교회에 나오실 때에도 우리 집 둘째 넝쿨이가 휠체어를 이용해서 할머니를 모시고 온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온몸으로 참아내신다. 치료비와 수술비로 수천만원의 돈이 들었지만 큰 진전이 없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신앙을 갖고 계신 분이시기에 모든 고통을 불행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기도와 감사생활로 받아들이신다. 기도와 찬송이 취미이신 분이다. 처음 내가 사는 교동에 모시고 왔을 때는 무척 건강하셨다. 텃밭도 가꾸고 시골생활을 즐겁게 하셨다.

그러다 5년 전 대구에서 사는 동생네 잠깐 다니러 가셨다 전신마비증세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셨다. 두 차례 척추수술을 하셨지만 회복불능이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태로 우리집안 초비상이었다. 2년 동안의 살얼음 걷는 기분이었다.

2003년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2003년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 박철
“긴 병에 효자 없다”고 한 가정에 사랑하는 사람이 당한 아픔을 공유하고 가족으로서 깊은 연대를 갖는다는 일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갈등과 아픔은 비단 장애인을 둔 가정에게만 떠맡길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함께 나누어야 할 문제이다.

서양속담에, “기쁨을 함께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을 함께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앞서 전홍구님의 ‘대통령도 모른다’는 시가 어떤 의미인가를 모든 사람이 같이 헤아려 주었으면 한다. 장애인들의 하소연을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사회이다. 그래서 이 사회가 장애인들의 아픔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과인의 간격과 경계마저도 무너져 명실상부한 국민 대통합의 사회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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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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