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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의 물살을 헤치며 배는 세차게 나아간다. 바람이 세찬건지, 파도가 심한건지, 거친 파도의 출렁거림에 이리저리 몸이 움직인다. 조금만 방심하더라도 금세 깊은 바다속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반쯤 먹다남은 콜라캔마저 남아있는 약간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갑판위를 구르고 만다.

망망대해. 푸른 바다위엔 아무것도 없다. 거칠 것 없이 달려가는 바다위의 레이스에 몸을 맡긴다. 저만치 조그만 섬들이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스쳐 지나간다. 그리곤 다시 사방이 온통 바다뿐이다. 간간히 조그만 배들이 지나가지만 이내 사라지고만다. 여전히 바닷바람은 세차게 불어온다. 머리가죽마저 벗기려는 듯 좀처럼 그칠줄 모른다.

서서히 눈에 익은 바다풍경에 싫증이 나고 눈이 절로 감겼다. 잠시 눈도 붙일겸 선실안으로 들어왔다. 출렁거리는 배의 움직임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이 관광객이었지만 그들 역시 피곤했나보다. 아직 해가 떠있을 때 '피피섬'에 도착하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했다. 그래서인지 저마다의 표정엔 오직 피곤이란 두글자만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소란해진 선실의 분위기에 눈을 떠보니 많은 사람들이 갑판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보니 사방이 온통 비취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취색 바다앞으로 하얀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그위로 수많은 방갈로와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두 개의 해안을 따라 펼쳐진 이국적인 해변의 풍경. 저곳은 분명 환상의 섬 '피피'임에 틀림없다. 에메랄드 보석이 이처럼 반짝거릴까. 눈부신 햇살때문인지 투명한 바다물 때문이지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빛나는 그곳. 바다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함이 잔뜩 묻어있는 초록빛 바다물 위에 금방이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 꿈의 낙원 피피에 도착하다
ⓒ 홍경선
태국 남부의 아주 작은 섬인 '피피'는 에메랄드 빛 바다의 출렁임이 햇빛에 반사되어 환상적인 모습을 자아내면서 매년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푸켓에서 남동쪽 20㎞ 지점의 크라비 지방에 위치해 있는 이 섬은 그 환상적인 경치만큼이나 스노클링으로도 유명하다. 아름다운 바다속을 가득 메운 해초와 각양각색의 열대어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좀처럼 수면위로 나오기가 싫어지는 매력을 지닌 곳이다.

'피피섬'이라는 이름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영문 알파벳 'P' 두 개가 놓여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피피섬은 엄격하게 말해서 두개의 섬으로 되어있는데 큰 섬을 피피돈, 작은 섬을 피피레라고 한다. 피피돈은 아름다운 해변과 방갈로 등이 있고 피피레는 바위뿐이지만 바이킹 동굴이라는 큰 동굴이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더 비치'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찾아가 그 환상적인 매력에 듬쁙 빠지고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마치 지상천국을 찾아 환상의 섬으로 떠나온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나 역시 그 어리석은 환상을 좇아 이곳을 찾아온 것일까? 드디어 도착한 피피섬. 하지만 환상의 섬이란 명성에 걸맞게 이미 도착해 있는 다른 배들과 관광객들로 선착장은 만원이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사람들 틈 사이로 간신히 빠져나오자 이번엔 묵을 곳을 소개하려는 소위 '삐끼'들이 달려와 극성을 부린다.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곳을 벗어나 시가지로 들어갔다. 시가지라고 해봤자 여행사들과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곳이다. 관광시즌이라 그런지 웬만한 숙소에는 빈방이 없었다. 한참을 물어물어 다니다 간신히 찾아낸 곳은 레스토랑과 함께 운영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싼 가격만큼이나 노후한 시설을 자랑하고 있었다.

세평 남짓한 공간에 조금만 일인용 침대하나와 선풍기가 놓여있었고, 간신히 두사람이 설 수 있는 비좁은 공간에 벽과 천장은 온통 나무판자로 지어져 있었다. 게다가 한쪽 벽과 붙어있는 욕실은 레스토랑과 공용으로 쓰이는 화장실이었다. 하지만 늦은 시각 싼 가격으로 이만한 방이라도 구한 게 어딘가 싶어 그냥 머물기로 했다. 그렇게 숙소를 구하고 나자 어느덧 오후 5시를 넘기기 시작하여 부리나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해변을 찾아 방을 나섰다.

좁은 골목 사이로 한참을 비집고 돌아다녀도 좀처럼 바닷가가 나타나질 않았다. 지나가는 행인들마다 붙잡고 물어봐도 중구난방일뿐. 한참을 돌아다니니 저만치 높은 언덕위로 계단이 놓여있었다. 왠지 그 언덕을 넘고나면 푸른 바다가 나올 듯 싶어 서둘러 올라갔다. 하지만 가파른 계단은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보이질 않고, 이마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어느덧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니 저만치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바다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은 깨끗이 사라지고 불투명한 결과만이 앞을 가리기 시작했다. 높은 곳을 향해 끝없이 올라가는 이 산행이 왠지 전망대로 향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미칠때쯤 드디어 해발 186m에 이르는 정상에 도착했다.

▲ 해발 186m의 피피전망대
ⓒ 홍경선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피피섬의 절경. 가운데 선명한 선을 경계로 두 해변이 서로 다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분명 하나의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태양빛을 머금은 두 해변의 색깔이 이리도 다를줄이야.

눈앞에 펼쳐지는 해질무렵의 장관에 많은 관광객들이 저마다 셔터를 누르며 추억을 남긴다. 우람한 근육과 늘씬한 몸매의 서양남녀들, 멋들어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 또한 붉게 물들어가는 해변의 아름다움만큼이나 볼만했다.

정상에서 맛본 피피의 매력에 흠뻑 젖은 채 본격적으로 그 푸른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 위해 서둘러 내려갔다. 해질녁의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넋을 놓다보면 언제 갑자기 날이 어두워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변의 다른 관광객들 역시 저마다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가슴가득 안고 내려가는 모습이다. 모두들 올라올 때완 달리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좀전에 힘겹게 올라오다 스쳐갔던 내려오는 사람들의 미소띤 표정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다시 여행사와 숙소가 밀집한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 상가지역을 벗어나니 한적한 힌콤해변이 나타났다. 정상에서 바라보았던 해질녁의 모습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조금은 어두워진 바다위로 몇몇 관광객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미지근한 바닷물의 감촉이 온몸을 적셔온다. 방콕의 재래시장에서 구입한 싸구려 수영복이 빠른 속도로 물에 부풀려 올라간다. 그 속도에 맞춰 나 역시 몸을 띄우려 했지만 파도를 몰고오는 바다는 이내 나를 덮어버린다. 그렇게 무중력의 이론을 몸소 증명하기 위해 연이어 몸을 띄워본다. 그럴때마다 이내 가라앉고마는 상황에 짜증이나 땅짚고 헤엄치기를 시도했다. 손 끝에 전해지는 바다 속 모래알갱이들이 부드러웠다. 혹시나 그속에 숨어있을 작은 게들을 찾기위해 잠수를 시도했다.

하지만 코와 귀속으로 물이 들어와 몸을 일으키니 좀전까진 몰랐던 추위가 밀려왔다. 오히려 바닷물속이 더 따뜻했기에 얼굴을 물밖으로 내민 채 몸을 담갔다. 물은 그리 깊지 않았다. 바다만큼 파란 색으로 물들어가던 하늘은 어느덧 회색빛을 띠기 시작했고 물속의 온도 역시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긴 여정 끝에 도달한 피피섬에서 어설프게 감기로 앓아눕기는 싫었기에 아쉬움을 머금고 물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내뿜던 바다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저녁노을 또한 지평선 위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듯 해변에 늘어서 있는 야자수들이 흔들거린다. 한낮에 공을 차며 뛰어놀던 아이들도, 튜브를 타고 파도의 움직임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던 비키니 차림의 여인들도, 가슴끈을 풀어제친 채 일광욕을 즐기던 섹시한 여인들의 모습도 어느덧 사라진 지 오래다. 넓은 모래사장엔 다정한 연인들이 그윽한 눈빛으로 서로를 탐닉하며 붉은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에메랄드빛 바다에 몸을 담그다
ⓒ 홍경선
어둠은 금방 찾아들었다. 붉게 물든 바다와 하늘의 풍경도 잠시뿐, 어느새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이내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피피의 밤은 또다른 세상이었다. 초록과 파랑이 조화를 이루며 환상적인 경치를 자아내던 해변의 낮과는 달리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레스토랑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푸짐한 해산물들로 가득한 음식들을 먹는 관광객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레스토랑의 수만큼이나 많은 마사지방 또한 피로에 지친 몸을 풀기위한 여행객들로 만원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적막한 해변의 모습과는 또다른 별천지였다. 적어도 이곳 돈이 오가는 상가지역만큼은 낮과 밤이 따로 없어 보인다.

한층 무르익은 밤의 풍경에 취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비좁은 골목길을 헤쳐나갔다. 고개를 돌릴때마다 마사지방의 투명한 창문사이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그순간 오랜 여행의 피로가 이미 쌓일대로 쌓였기에 이젠 풀어야할 때가 왔다고 나름대로 판단을 했다. 그렇게 찾아간 한 마사지업소. 일렬로 늘어서있는 널따란 침상위에 몇몇 여행객들이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마사지사들의 능숙한 손놀림에 몸이 나른해지는지 저마다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틈에 끼여 천천히 몸을 뉘였다.

두눈을 감으니 어느새 매력적인 아가씨의 모습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살며시 옆에 다가와 앉는다. 그리고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내 온몸을 쓰다듬으며 달콤한 목소리로 무언가 말을 건네온다. 하지만 짦은 단상에서 깨어나 눈을 떠보니 전형적인 태국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능슥하게 내 몸을 만지고 있었다.

교묘하게 관절을 꺾어가며 피로를 풀어주는 기술이 거의 예술이었다. 하지만 목과 등, 팔과 다리 등 온몸 구석구석 성심성의껏 마사지해주는 아주머니에게 왠지 미안한 맘이 들었다. 비록 돈을 지불하고 받는 서비스이긴 하지만 태국 북부의 치앙라이에서부터 며칠밤을 쉬지않고 달려온 몸이기에 여간 더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다속까지 들어갔다 나온 몸이니 소금기와 때, 그리고 모래가 한바탕 어우러진 오염인간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닌가.

아주머니 역시 내 몸상태를 인식했는지 힘주어 지압을 할때마다 밀려나오는 검은 때와 소금, 그리고 모래를 털어내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괜히 민망한 마음에 여기에 오기까지의 오랜 여정을 설명했건만 알아듯는지 모르는지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열심히 관절을 꺾고 있었다.

그렇게 한시간 정도 느긋하게 마사지를 받고 나니 확실히 피로가 풀린듯했다. 하지만 피로를 한번에 풀려해서 그런지 온몸이 천근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몸을 일으키는 것 조차 힘이 들 정도였으니 오히려 배로 무거워진 발거음을 이끌고 간신히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기에서 내뿜는 시원한 물줄기가 온몸을 적셨다. 시원한 물줄기 사이로 비누를 가득 묻힌 타올로 몸을 닦아내니 그제서야 상쾌한 기분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팔 하나 다리 하나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고통을 동반하는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간신히 샤워를 마친 후 세평 남짓한 골방에 마련된 나무 침대위에 몸을 뉘였다.

순간 극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상쾌한 피로다. 서서히 눈이 감기며 몸의 움직임도 둔해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현실에서의 기억은 꿈속을 향해 나아간다. 가끔씩 마사지 받을 때의 느낌이 몸 구석구석에서 전해졌다. 그 느낌은 굳게 뭉친 근육이 능숙한 지압기술에 의해 풀리며 전해지던 시원함이었다. 작은 선풍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보다도 더 시원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 그대로를 간직하며 깊은 잠에 빠졌다. 날이 새는지도 모른 채 깊고 깊은 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이대로 밤을 보낸뒤 알람소리에 눈이 떠지면 또다른 피피섬의 모습이 펼쳐질 것이다. 그곳엔 환상적인 열대어들의 행렬을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스노쿨링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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