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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때론 무섭고, 엄하고 가끔씩은 바위 같으신 분이셨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직업은 트럭 운전사였다. 서울에서 시작해서 전국을 누비며 시작한 운송업으로 우리집을 이끌어 가셨다. 아버지의 직업상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시는 다른 아버지들과는 달리 3일에 한번 길게는 4일에 한번 볼 때가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그 당시 매일같이 출·퇴근하시는 내 친구들의 아버지가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또한 '남들은 커다란 대문이 있는 집에서 다들 사는데 왜 우리집은 좁은 골목길 옆에 나무로 된 쪽문에 살까'하는 궁금함도 있었고, '왜 우리는 집 없이 주인집에서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일까'하는 의구심도 들었었다.(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생각들이지만 그땐 정말 그랬다)

한 2년이 지난 후 아버지의 트럭은 두 대로 불어났고, 한 대는 아버지가, 다른 한 대는 아버지 밑에 운전기사들이 맡아서 트럭 운송업을 계속 하고 있었다. 말이 트럭 두 대지 경제적으로 힘든 건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어머니만 더 일이 불어난 꼴이었다. 세탁기 없던 우리 집은 기사들의 옷들은 물론 나중엔 기사들은 속옷까지 어머니가 손수 다 빨아서 대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가는 우리집이지만, 우리 가족들의 마음만큼은 어느 가정보다도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가족이었다.

며칠에 한번씩 힘든 모습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시는 아버지는 항상 우리 두 형제를 먼저 안아 주셨고, 집에 들어오시면 항상 그랬듯이 '삼부자 노래'를 부르시게 하셨다. 작사 작곡은 다 아버지께서 하셨고 지금 생각하면 노래라 하기엔 형편없었지만, 아무튼 그 '삼부자 노래'는 우리집 주제가나 다름없었다.

"아들들~~삼부자 노래 준비~~"
"얏(오른쪽 주먹을 군가 부르듯이 어깨 위에 올리고)"
"삼부자 노래 시~~작~~"
"(군가처럼 팔을 아래 위로 올렸다 내리며)우리는 다정한 삼부자의 가~~족"
"이놈들이 목소리가 작다~~~다시~~삼부자 노래 준~~비"
"얏"
"삼부자 노래 시~~작~~"
"우~리~는 다~정~한~~ 삼부자의~~노~~래~~"
"그렇지. 그 정도는 해야지. 이리 오거라"

하면 우리 두 형제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 오늘도 여지없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으쓱해 하곤 했다. 그런 우리 삼부자를 보시곤 어머니께서 아무 말씀 없이 웃으시곤 하셨다.

그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추석이 다가오기에 어머니께 돈을 건네주시며 "당신이 좀 있으면 추석이니깐 다른 건 다 못해도 우리 홍기, 종기 이놈들 옷 한 벌씩 사줘"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돈이 있다고 옷을 사 줘여. 명절이라 다른 곳에 들어갈 때가 얼마나 많은데."
"어허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우리 아들들 옷부터 사줘. 다 우리 식구들 행복하자고 돈버는 거지 머. 잔말 말고 옷부터 사줘."
"알았어요."
"옷 살 때 또 혹시라도 오래 입으라고 큰 옷들 사주지마. 내년에 또 살지언정 애들 옷은 딱 맞는 걸로 사줘. 그래야 이쁘니깐."
"알았어요."

그때 옆에서 상황 파악을 마친 우리 두 형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해 안절부절 못했고, 그런 우리들의 맘을 눈치채신 아버지께서는 "이 자식들이 엄마 말도 잘 안 듣는 것들이~. 그래 말 안 듣고 공부 못해도 좋다. 대신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고 말씀하셨다.

"왜? 아빠, 우리 엄마 말 잘 들어. 그~치 엄마."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행복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지만 가끔씩 이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몇 번 있었다.

아마 추석 전 날이었던 것 같다.

명절 때면 시골 큰집은 항상 바쁘기 때문에 어머니께선 먼저 시골로 내려가시고 우리집은 아버지와 우리 두 형제만 남은 상태였다. 내려갈 모든 준비를 마친 채 잠을 잘 준비를 하며 우리 두 형제는 새로 산 옷이 혼자서 도망갈까봐서 눈앞에 걸어놓고 빨리 내일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집으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의 목소리는 분명 떨리고 있었고, 전화기를 잡고 있는 한 손도 미세히 떨고 계셨다. 한 5분 동안의 통화 후 아버지는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으시고 말없이 담배를 피우시다.

"홍기야, 가서 소주 한 병만 사오너라."
"예."

평소 소주는 커녕 맥주 반잔도 못 마시는 아버지였기에 이상하다 싶었지만 난 아무말없이 소주를 사왔고, 아버지는 그 소주를 말없이 따르고 계셨다.

우리 두 형제 역시 무언가 일이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냥 아버지의 소주 드시는 모습만 멍하니 바라볼 뿐 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였지만, 그 한 통의 전화는 이제 막 열심히 일하며 일어나려는 우리 가족에겐 날 벼락같은 전화였다.

내용은 즉 명절이라 마지막 장거리 운송을 아버지가 안 가시고 아버지 밑에 기사들이 가게 되었고, 명절 당일인 내일 아침이면 기사들이 아버지 집으로 오게 돼 있었다.

아버지는 명절이기에 손수 기사들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는 명목을 '떡값'을 주려고 우리는 기사 아저씨들을 기다리며 하룻밤을 더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명절 전날에 두 대 뿐인 아버지 트럭 중에 두 대가 전부 대형사고가 난 것이었다. 다행히 사고에 비해 기사 아저씨들은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 막대한 충격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제 우리 가족은 말 그대로 망한거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한참을 우리 삼부자는 침묵이었고, 어느덧 소주는 반 병 뿐이었다. 아버지께서 나와 동생을 보시며 "아들들~~이리 아빠한테 오너라" 말씀하셨다. 아무말없이 우리 두 형제는 아버지 품으로 안겼고, 그런 우리 두 형제를 아버지께서 쳐다보시면서 "아빠가 아무 것도 없이 이 서울로 올라와. 이제껏 나쁜 짓 한번 안하고 열심히 우리 홍기 종기를 위해 이렇게 살았는데 참 세상이 힘들구나"하시며 아버지는 우리 두 형제를 앉으시고 우시는 거였다.

내가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두 형제는 아버지가 우시자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이런 우리 두 형제에게 아버지는 "임마! 울긴 왜 울어. 흑~~~흐~흑",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참~~아빠가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해도 이렇게 힘들때가 있더구나. 흑~흐~흑", "아빠가 우리 홍기 종기가 이렇게 있는데도 참 지금 힘들구나~" 넉두리처럼 한참을 말씀하셨다.

우리 두 형제와 아버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우리 두 형제만 시골로 갔었고, 아버지께서 그 명절날 시골에 내려오실 수가 없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세상을 상대로 열심히 살아가려는 어느 트럭 운전수의 눈물이기도 하며, 처자식을 둔 어느 가장의 눈물이기도 했다.

난 이제서야 그때 아버지의 눈물을 이해할 것 같다. 그때의 나의 아버지의 눈물은 분명 가족들을 위한 아픔의 눈물이요, 열심히 살아가려는 당신을 도와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의 눈물이었다.

지금도 또한 여느 때처럼 당신들의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며 고생하시는 우리 아버지들의 눈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자화상인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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