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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에서 막 꺼낸 김장 김치의 모습
항아리에서 막 꺼낸 김장 김치의 모습 ⓒ 최성수
그러나 계절의 바뀜은 어쩔 수 없는지 한낮에는 제법 따뜻한 햇살이 겨우내 얼었던 땅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마당가에 그득하게 쌓여 차를 헛바퀴 돌게 하던 눈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밭고랑에 들어가니 흙 좋은 밭고랑은 이미 다 녹아 발목이 푹푹 빠질 정도입니다.

"오늘은 비닐 씌우려고 했는데, 안되겠네."
밭을 둘러보던 친척 동생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립니다. 밭이 너무 질어서 트랙터가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동생의 시선이 닿는 밭에는 계분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거름으로 뿌려놓은 닭똥 비료는 냄새가 지독합니다. 나는 그런 냄새를 코를 킁킁거리며 맡아봅니다. 농촌에서는 이것이 바로 봄의 냄새겠지요.

이제 머지 않아 저 밭 가득 감자를 심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동안이 지나면 밭에는 감자 싹이 가득하겠지요. 감자 캐는 날의 그 흥성한 마음을 기억하며 나는 잠시 밭고랑에 서 봅니다. 산 발치에 심기 위해 사 가지고 간 은행나무와 엄나무 묘목을 밭에 가식해 놓고 김장독을 묻은 곳으로 갑니다. 오늘은 밭 가운데 묻은 마지막 김장독을 헐기로 한 날입니다.

작년 11월 초 우리는 모두 김장 김치를 다섯 독에 담가 넣었습니다. 마당 옆 세 항아리에는 동치미와 달랑무, 갓김치 따위를 해 넣고 밭 가장자리에는 두 개의 항아리를 묻고 배추김치를 담갔습니다. 친구네 식구들과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 좀 많이 담근 편이지요. 김장 항아리를 보자 문득 김장 담그던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납니다.

주말이면 내려와 짓는 얼치기 농사라 그저 흉내만 낼 뿐 제대로 농작물을 돌보기에는 손도 모자라고 경험도 얕은 터라 배추 농사도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추가 통이 오르자 짚 대신 비닐로 묶어주곤 1주일 만에 가보니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에 배추는 잿빛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 전 주만 해도 파랗고 싱싱하던 배추가 얼어버린 밭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언 배추 때문에 더 처연해 보였습니다.

부랴부랴 배추를 뽑아 다듬어 보니 다행스럽게도 속까지 언 것은 아니어서 김장을 담글 수는 있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김장은 파란 배추 겉잎은 없고 노란 고갱이만 있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수확한 배추는 씻고 절여 쌓아 놓으니 수돗가가 그들먹하게 많았습니다.

우리를 비롯한 친구네 세 가족이 함께 담그는 김장은 노동이라기보다는 축제였습니다. 남자들은 구덩이를 파고, 김장독을 묻고, 배추를 나르고, 여자들은 속을 버무리고, 매운 손을 비비며 속을 넣고, 무를 써느라 떠들썩했습니다. 우리 늦둥이 진형이 녀석도 덩달아 신이 나서 배추쌈을 먹고는 매워 혀를 씩씩거리기도 했고, 제 팔뚝보다 굵은 무를 낑낑대며 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녀석은 배추 뽑는 날도 언 손을 호호 불며 볼이 바알개지도록 배추를 날랐습니다. 그런 녀석을 보고 제 어미가 웃으며 한 마디 하기도 했습니다.

"진형이 너 완전히 시골 아이 같구나."
엄마의 말에 녀석은 듣기 좋은지 해죽해죽 웃었습니다. 그 후 몇 날 동안 녀석의 별명은 '볼 빨간'이 되었습니다. 밤 늦도록 김장을 끝내고 월요일 새벽에 일터인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고향 김치독 속에 담아 두고 왔지요. 찬 겨울 바람 속에서도 땅 속에서 익어갈 김치를 생각하면 입에 군침이 고였습니다.

막 꺼낸 김치의 먹음직스러운 모습
막 꺼낸 김치의 먹음직스러운 모습 ⓒ 최성수
서울 집으로 돌아온 뒤 늦둥이 진형이 녀석은 제 친구나 친척들만 보면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내가 김장 담갔다. 배추 많이 날랐어."
텔레비전에서 김치 냉장고 광고가 나오면 전에는 우리 집에는 왜 김치 냉장고가 없냐고 불만 섞인 말을 하던 녀석이 작년 김장을 담근 후에는 그런 투정 대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김치 냉장고가 다섯 개나 있어. 집 옆에 세 개, 앞밭에 두 개, 모두 다섯 개야."
땅에 묻은 김치 항아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녀석의 말마따나 어디 김치 냉장고가 땅에 묻은 김장독만 하겠습니까? 지난 겨우 내내 우리를 비롯한 친구네 가족들은 늦둥이 말대로 하면 땅에 묻은 김치 냉장고에서 알맞게 맛 든 김치를 꺼내다 먹는 재미를 마치 다락 속에 감추어 둔 할머니나 할아버지 간식거리를 몰래 먹는 재미처럼 느끼곤 했습니다.

그렇게 먹은 김장 김치가 어느새 다 떨어지고 한 독만 남았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남은 김치독을 3월 말에 헐기로 했습니다. 밭에 묻은 김치독이지요. 곧 농사철이 가까워져 밭을 갈아야 하기 때문에 더 둘 수가 없어서입니다. 이미 계분이 봄 농사를 위한 거름으로 뿌려진 밭에서 마지막 남은 김장독은 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몸 속의 김장을 익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항아리를 덮었던 흙을 걷어 내고 덮개를 벗기자 벌써 잘 익은 김치의 군둥내 같은 것이 확 피어올랐습니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 그 안에는 선명한 고춧가루 빛깔도 곱게 김장 김치가 익어 있었습니다. 먼저 한 점을 집어 입에 넣고 씹어보니 그 맛이 기가 막힙니다. 적당히 익은 김치의 입 안 가득 퍼지는 상큼하고 시원한 맛이 그만입니다. 아내가 얼른 섞박지 무를 하나 꺼내 입에 넣어 줍니다. 사각사각 씹히는 무의 감촉도 좋고 적당히 김치 국물이 배어 곰삭은 무는 씹을수록 그 맛이 깊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한 숟가락이 생각나는 맛입니다.

먼 산에는 흰 눈이 있지만 봄은 봄이다. 항아리를 꺼내고나면 그 밭에 머지 않아 고추와 봄 무를 심게될 것이다
먼 산에는 흰 눈이 있지만 봄은 봄이다. 항아리를 꺼내고나면 그 밭에 머지 않아 고추와 봄 무를 심게될 것이다 ⓒ 최성수
김치를 다 푸고 항아리를 꺼내 씻고 나자 괜히 허전한 마음이 듭니다. 지난 11월 초 담갔으니 근 다섯 달을 땅 속에서 익어 온 김장 김치가 이제 끝이라는 아쉬움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우리들은 고기를 숯불에 구워 김장 김치와 함께 먹으며 비록 주말에만 짓는 농사지만 올해도 열심히 배추도 기르고, 고추도 심고, 감자도 심고, 남는 땅에는 토마토 같은 것들도 심어 봐야겠다며 어느새 다가온 봄과 농사철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진형아, 이제 우리 집에는 김치 냉장고가 몇 대나 있니?"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가 진형이에게 묻자 녀석이 손가락을 꼽아가며 대답을 했습니다.
"응, 다섯 대가 있었는데 이젠 하나도 없어. 김치를 다 펐거든."
녀석의 대답에 아내가 웃으며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우린 김치 냉장고가 하나도 없는데."
엄마의 말에 녀석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천연덕스레 대답을 했습니다.
"응, 걱정하지 마. 또 농사 지으면 되지 뭐. 배추를 아주 많이 심으면 돼. 그래서 항아리에 담으면 되지. 그럼 김치 냉장고가 또 생기는 거야."

녀석의 대답에 우리 부부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녀석의 말대로 다시 배추를 기르고, 고추도 심고, 콩도 가꿀 생각에 겨우 주말에나 짓는 농사지만 마음만은 더 없이 푸근해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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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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