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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희
"99년에 발병했죠. 다행히 동생의 골수를 이식했는데, 아직 살아있네요."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유일한 치료법은 골수이식이다. 하지만 맞는 골수가 나타날 때까지 한평생을 기다리기엔 남아있는 삶이 그리 길지 않다. 결국 골수를 찾지 못한 사람들에겐 기적의 신약이라 불리는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이 유일한 살길이다.

"글리벡을 먹다보면 2억짜리 집을 팔아도 3년 약값으로 쓰면 땡입니다."

환자의 80%에 달하는 가장들은 가족들 생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대부분 약을 먹지 않고 그냥 죽는다고 한다.

"언제 완치될지도 모르는데, 나 하나 살자고 가족들 굶겨 죽일 순 없다는 거죠."

한 알에 2만3천원이나 하는 약값 탓에 가족이 굶어 죽든, 환자가 아파 죽든, 한쪽은 죽게되는 기막힌 현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백혈병 환우회의 '글리벡 약가인하 투쟁'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2년여의 싸움은 지난 1월 국가인권위 점거로 이어졌고, 마침내 '보험적용 확대', '본인부담률 인하'라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사랑의 리퀘스트로 몇 명이나 살리겠어요"

"희망을 가지면 죽음을 자신의 삶 속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싸움 속에서 희망을 본 강주성씨는 환자들을 동정적 시각에 가둬두는 사회풍속을 꼬집었다. "정부와 방송사는 환자들이 불쌍한 사람이란 인식을 심으면서 결국 사회가 책임질 문제를 개인의 안타까운 삶으로 슬쩍 바꿉니다."

명절 단골 프로인 '사랑의 리퀘스트'는 머리카락 다 빠진 불쌍한 아이들만 보여준다.

강주성씨는 "1천원짜리 ARS온정은 값싼 동정일 뿐, 환자가 돈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되는 한국의 의료 현실을 바꾸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꼬집는다.

의사와 환자는 수평적 관계

완전한 승리는 아니지만 환자의 경제적 부담을 크게 낮추면서 글리벡 문제의 한 매듭을 지은 그의 다음 목표는 전국적인 환자 대표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의사, 약사는 환자와 함께 병을 이겨나가는 동지라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된 게 한국에서는 돈 내는 환자들이 오히려 설설 기죠."

환자는 죄인 아니라고, 좀 더 당당해지라고 말하는 그는 곧 전국적 환자 대표단체를 만들어 이들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라 한다.

"죽다 살아서 그런지 이젠 예전처럼 빌빌거리며 살지 않습니다. 다른 환자들을 만나면 병은 하나님이 마련해준 삶의 전환점이란 말을 꼭 해주죠."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찾게 된다며, 병에 걸린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강주성씨.

"다행이란 것도 아직 살아있으니 느끼는 거겠죠. 투병기간 중에 지인들이 한푼 두푼 모아준 생활비와 헌혈증을 다 받아먹고, 병 나았다고 입닦을 수 있나요? 받은 만큼 베풀며 살겁니다."

기다려라

-대학생신문에 연재된 '백혈병 환우회 사는 이야기'
마지막회로 보낸 시입니다


우리는 싸웠어요
단지 살기 위해선 그 길 밖에 없었거든요

우리는 모두 백혈병 환자이고
아이의 얼굴을 하루라도 더 보려면
약을 먹어야 한답니다
집을 팔아 전세로 옮긴 돈이
약값으로 일년을 채 못 버티더라도
살아 있으려면 약을 먹어야 하지요.
병든 아버지는 그냥 죽겠다며 약을 안 드시고 우셨지만
아들은 뻔히 보이는 패가망신의 길을 계속 가야했어요
동일한 가치, 동일한 삶 - 그것을 만드는 이 거대한 공장에서
결국 우리는 병이 든 채로 버려지기 일보직전이었어요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죠.

그러나 어쩔까요
이 죽어가는 몸이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 말이에요
우리는 앉아서 죽을 자유가 없다는 것을.
국가가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둘 자유가 없고,
우리는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어쩔까요. 몸으로 알아 가는 이것을

그래요 그래요 잠시 기다리세요
할 수 없어요
생명을 우리가 만들어 가는 수 밖에요.
앞으로 약값은 우리가 결정하고,
의료시스템도 우리가 만들어 나가며
그래서 우리가 이 의료계를 평정할 수 밖에요.
생명과 희망의 아름다운 연대,
환자가 만드는 새로운 의료현실을 펼칠 수 밖에요.
작지만 낮게 아픔을 섞어 하늘에 던집니다.

'우리가 간다. 기다려라'

/ 강주성 (한국백혈병환우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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