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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 ⓒ 오마이뉴스 권우성
며칠 전 조간 신문 1면에 실린 처참하게 부상당한 한 이라크 소녀의 사진을 보다가 흠칫 놀라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폭격으로 발목이 잘려나간 채 할아버지 품에 안겨 축 늘어져 있는 사진 속 어린 소녀의 모습은 칼끝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으로 다가왔다.

전쟁은 어리석은 인류가 만들어낸 반문명적 비극이자 재앙이다. 전쟁을 반대하는 세계 각국의 양식 있는 수백만 시민과 함께 나는 양심을 걸고 전쟁에 반대한다. 나는 지난 2월 3일 여야 의원 34명과 함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데에 동참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은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고민과 고뇌 끝에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라크에 의료지원단과 건설공병단 70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국회에 동의를 요청해왔다.

나는 몇 날 며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을 반대하는 나의 양심과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 아니냐'는 불안감 사이에서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루는 날도 많았다. 오래 전에 읽었던 대학자 막스 베버의 명 저작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서가에서 다시 빼들고 정치적 선택의 순간에 번민할 수밖에 없는 '심정 윤리'와 '책임 윤리' 사이에서 정치인은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가에 대한 베버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심정 윤리'는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선과 악의 구분 사이에서 선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 윤리'는 선과 악의 구분과 함께 그 정치적 결과에 대한 무제한의 책임을 지는 태도를 뜻한다.

내가 이라크 파병 문제를 고민하고 판단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요소는 '북한 문제를 풀어 가는 데 있어 어떻게 하면 한미 간의 합의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미국과 각을 세워 한미 간 갈등과 불신이 증폭되면 북핵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한국과 미국이 각각 각자의 길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게 될 것이다.

국제 사회는 냉혹하다. 국제무대에서 각국은 철저하게 자국 이익을 기준으로 행동한다. 그럴듯한 레토릭(수사)과 논리로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핵심은 자국의 이해관계이다. 국제사회의 최대 불안요소의 하나인 북핵 문제의 사실상의 당사자로서 우리에게 국익은 무엇인가? 북핵 문제의 고비를 안전하게 넘는 것이 바로 국익이 아니겠는가?

또한 한미 간의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면 그 영향의 첫 번째 희생자는 취약한 한국경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시장에 들어와 있는 외국 투자자들은 전반적으로 한미관계의 안정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그들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한미 공조가 잘돼야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일 북핵 문제에 대해 미국이 강경 정책을 구사하려 할 경우 이를 제어하고 만류하기 위해, 그리고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촉진하기 위해 미국과 각을 세우기보다는 파병 요청을 받아들여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라크에 대한 공격은 지지하면서 나중에 어떻게 북한에 대한 군사적 제재를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파병반대 논리도 충분히 근거가 있다. 그러나, 아직 불안정한 남북관계 속에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넘기 위해서는 한미 동맹 관계의 기본을 부정할 수 없다. 전투병이 아닌 의무병과 건설공병의 파견 결정은 그런 점에서 전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면서 한미 관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노 대통령이 고뇌하고 심사숙고한 결단이라고 믿는다.

나는 최근 민주당의 정동채·송영길·임종석 의원과 함께 북경에 다녀왔다. 북핵 문제의 정치적 경제적 해결을 위해 중국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주문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메시지를 중국 지도부에 전달하고 이들을 상대로 어떻게 하면 한반도의 북핵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깊이 있는 토론을 벌였다.

돌아오는 비행기 창 밖으로 뿌옇게 북한 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험난한 국제정치의 격랑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킬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정치인의 최고의 책임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나의 판단 기준은 장래의 국민 이익과 국가 이익이다. 지금 국민 여론은 파병 동의안을 놓고 찬반으로 팽팽하게 맞서 있다. 하지만 정치인들의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파병 반대가 압도적으로 크다. 정치인으로서 파병을 반대하는 데에는 도덕적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과 같이 거센 반전(反戰)여론의 바람이 부는 상황 속에서 파병에 찬성하는 것 역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파병안을 놓고 이성적 찬반 토론의 전개는 우리의 시민사회가 성숙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파병안에 대한 찬반 여론이 국론 분열로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고민을 십분 이해하고 파병 동의안에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을 지지하는 철학이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낼 의무부대와 공병단은 이라크 민간인들에게도 치료와 복구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겉으로 보면 파병은 전쟁을 지지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평화적 해결의 고뇌가 숨어있다는 점을 우리 국민들이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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